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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났다. 이복래( '}따來)가 이날 저녁 각자 관솔불을 가지고 남태령(|셔짜 상 D 에 모여 만세를 부르자는 통문을 작성하여 이민(띤[\':)들에게 희람시켰다. 이복래는 그날 밤 띠리 만들어 놓은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주민 50여 명과 함 께 남태령에 모여 과천 읍내로 들어가며 경찰관 주재소·우편소·보동학교 앞 등을 돌며 렛불 만세시위를 벌였다10. 8. 군자연 (암 fl 띠) 장곡리 (과유 1 j!.) 주민들이 3월 29일 만세시위를 벌인데 이어11. 4월 4일 군자 띤사무소가 있는 거모리 (ι( lj!J 에서 원곡리 (ι깐 11D 에 사는 강은식(갖J]X: ND 이 수백 명의 군중 속으로 블어기- 태극기를 휘두르며 주민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같은 날 죽율리 (竹1차|!!)에 시-는 김천복(없 T-삐,\)도 동리 사람 들을 설득하여 이장 집에 모이게 한 다음 이들 30여 명을 이끌고 거모리의 면 사무소로 향하던 도중 총소리가 나자 일부 주민이 흩어지기는 하였지만 김천 복과 몇몇 사람들은 만세시위에 힘세하였다. 선부리 ( 1111씨 ||{)의 서딩- 생도 권 희 (빠↑낀)와 장곡리의 농민 징-수산(파,,냥1I1) 둥은 4월 6일 권희의 전에서 「비 밀 통고」라는 제옥 아래 ‘조선인이 일본에 합병된 이래로 받은 10년 간의 학 정 (J, 다政)에서 벗어나자’ 라는 격문을 쓰고 7일 면내의 구시장터로 태극기 하 나씩을 갖고 모이라는 사발통문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각 동리에서 차례로 희 람할 수 있도록 그림으로 표시한 뒤 이를 동리 구장의 조카 이종영 (.AfH榮)의 집 앞에 놓아두아 많은 사람이 희람하도록 하였다. 또한 장곡리 구-장 이덕증 (쑤씬백)은 이를 희람한 뒤 월꽂리 CJ Jll\lfD 구장에게 전달하였다 이러한 과 정에서 시위 모의가 일펀 경찰에 말각되고 주모자들은 체포되고 말았다12. 4월에 접어들면서 띨본 경찰의 폭압적인 시위 진압이 진행되지- 비폭릭을 주장하였딘 만서 1시위도 그 양상을 딜리하기 시작하였다. 3일 1,000여 병이 참가한 영등포의 시위에는 본격적인 일본 경찰의 발포가 있었고, 10일 시흉변 에서는 군중들이 모여 연장 집에 불을 지르기도 하였다13. [3] 서울 경기도의 3· l독랩만 서|윤동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