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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독립만세를 부르고 읍내의 향교와 면사무소, 보통학교를 돌면서 시위를 주도 하였다. 와리(포파)에 사는홍순칠(파핸七)은유익렬(柳益烈)의 하인 임학신 (林젠信)에게서 비석꺼리 집회 소식을 듣고 허치선(計致폭)의 집에서 30여 명이 모이자 이를 인솔하여 참기-하였다 홍순칠은 “조선이 독립하면 국유지는 소작인의 소유가 되니 함께 만세를 불러야 한다.”고 소작 농민들을 설득하였 다. 윤동욱(尹싸)IL'.)은 능곡리 Cl 쌓까 'IdJ 의 농민으로부터 집회 소식을 듣고 참 여하였는데 보통학교 앞에 이르러 만세시위 대열을 막는 조선인 순사 임건호 (任I않$펴)에게 “당신도 조선인이니 만세를 부르라- 관리가부르면 군중들이 따 라갈 것이다”라고 요구하였으나 순사는 불응하였다. 화정리의 낌병권(金자 +않)도 동리 주민 30여 명과 함게 만세시위 에 참여하였으며 수암리 (秀岩및) 의 이봉문(李후文)은 자가 마을 앞에서 진행된 만세시위 에 솔선하얘 참여한 뒤 이날 밤 시위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구장 집에 다른 주민들과 같이 몰려가 항 의하기도 하였다 특히 유익수는 만세시위가 폭력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중 들을 설득하기도 하였으며 이튿날도 인끈 수원군(水폐쉬JI) 반월띤(싹Jli띠) 에 가서 만세시위가 폭력화되지 않도록 주민들을 설득하여 비폭력 시위로 이끄 는데 노력하였다6 5. 남면(南뼈) 남면 주민들은 3월 31 일 인근 수원군 의왕면(健IJJ: I며) 주민과 합세하여 약 2,000여 명이 군포장(軍im楊) 에 집결하여 독립만세시위를 벌이띠 주재소를 비롯한여러 곳을습격하였는데 출동한경찰들이 발포하여 해산시켰다1. 6. 서연(西面) 서면 노온사리 (ε溫、7 및)에서는 3월 27일 주재소 근처에서 이정석(李피까) 이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가 주재소에 구-금되었다. 3 [3] 서울 경기도의 3· l독럽만세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