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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에는 다시 영동포에서 2,000여 명이 참여하는 만세샤위가 있었고 이 후 각 지방으로 만세시위를 퍼져 나갔다. 2. 신동면(新짜패) 3월 25일에는 잠설리 (難室및) 주민 100여 명이 26일에는 양째리 (良才및) 주 민 200여 명이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3. 같은 날 원천사(元없끊) 지역에 서는 300여 명의 주민이 주재소를 습격하며 격렬한 만세시위렐 벌였다4‘ 3. 서이연(때=뻐) 3월 27일 비산리(飛山 1 [)에서는 포목 행상을 하던 이영래(李永來)가 일동리 (-洞 |끄) 백기화(「|꿇和)의 집에 들렀다가 그 집에 모여 짚신을 삼고 있던 동 리의 이종교(李핸敎) 동 여러 사람들에게 “다른 동네에서는 똑립만세를 크게 부르며 기세를 올떠고 있는데 당신들은 한가하게 짚신만 삼고 있느냐”며 이들 을 설득하여 동리 주민들과 함께 그 날 밤 8시 일동리 서쪽 언덕 위에서 독립 만세를외쳤다s. 4. 수암면(秀岩而) 수암면에서는 3월 30일 오전 10시 비석거리 (細i洞)에 18개 리에서 2,000 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이미 전날 읍내의 비석거리에 모이라는 통문을 각 고 을의 이장에게 돌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었다. 윤병소(켜乘昭)는 29일 화정리(花깃|;모)에서 이봉구(李鳳九)로부터 비석거리에서 만세시위가 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자기 동리 사람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어 시 위 대열에 참여하였으며 월피리(月|波里)의 유익수(빼ll益秀)는 성포리(훨해 파)의 주민 30여 명이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 윤병소와 함께 선두에 서서 이들을 지휘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본켈은정진각정휠입 1 한사핀찬위원회. r한국독렘운동사J2, 1968‘ 262-263쪽 2 _m,영씨I. r.EJli\:1'.fi料」25, 1967. 3 뱅1'.編lHHi현, 앞의 책 263쪽. 4 위와 같음 5 뼈'.t~훌깅~n험, 위의 책, 262쪽 *3· l옥렵만세운동의 전개 ‘ • 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