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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이 일어났다. 이것은 일제의 억압 속에 살아오던 민족 적개심의 끈질긴 발현으로서 어떠 한 억압과 제지에도 쉽사리 굽힐 줄 모르는 강인성을 나타낸 젓이라 하겠다. 각 지역별 만세 운동의 주체가 된 것은 각계 각층을 망라한 것이었다 그러 나 다만 그들이 체해 있는 여건에 따라 주종(主從)의 관계에 서게 되었을 뿐 이었다. 천도교 측의 푸동 지역은 북부의 6개도 이었으며 남부의 7개 도에서는 그 활동이 전혀 없었거나 간흑 있었다 하더라도 보잘 것이 없었다. 처음 천도교가 창시(創始)되고 또 크게 번창하였던 삼남(三l휩) 지방에서 의 천도교 측 활똥이 오히려 미약한 까닭은 동학운동(束學述動) 이후 계속되 는 탄압으로 말미암아그 교세가 궤멸 또는 북상한 데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천 도교 측의 만세 운동 주동 지역은 중소 도시와 산간 지역이었다. 기독교 측의 푸동 지역은 주로 북부지방에 치우치는 편이었고, 충청도 지 방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그런데 기독교의 각 종파 중에서 도 장로교(長老敎) · 님-감리교(|뀌짧理敎) -북감리교(北짧웰敎) 등 신교파와 구 세군(救|끄rp:) 이 푸체가 되었지만 천주교(天 E敎)의 활동이 선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도 정치와 종교를 엄격히 분리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기독교 측의 만세 운동은 대체로 대도시와 철도 연변에서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그 들의 교세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천도교-와 기독교 측이 합동으로 운동을 일으킨 곳도 많으며 함경도 지방에서는 이들 두 종교 단체가 경쟁적으로 만세 시위를 전채하고 있었다. 각급 학교 학생이 단독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한 지역은 주로 남부 지방이었 으며, 또 서당 생또가 주체가 된 곳도 10여 개소나 있었다. 이 같은 학생씌 활동은 사립 학교와 서당에서 꾸준히 민쪽 교육을 실시하 제3장 3· l독렵안세 운동의 천개 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