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級)과 경원선(京元級) 등 철도 연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연락이 용이했기 때문 이며, 또 3·1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였던 민족대표 중 기독교 측 대표들 대부 분이 이 지방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3월 1일 서울을 비롯한 그 이북 지방의 6개 도시에서 선포된 독립 선언과 만세시위 운동은 거족적인 3 · l독립 만세운동 전체에서 볼 때는 그 첫 봉화(峰火)를 올린 데 불과하였다. 1일에 이어 2일에눈 이미 궐기했던 대도시는 물론 그밖에도 황주(깅!딘l'i). 중화(I 11和)·강서(江f14) .대동(太|可)·함흥(J짜興) 등지에서 새 불길이 올랐다. 또 3일에는 예산(웹山) -개성 (|채城) · 수안(途갖) · 사리 원 (沙및院) · 송림 (松 林) · 곡산(유I JI) 통천(通川)으로 만세의 함성이 번져 나갔고, 4멸에는 옥구 ox핍) ·성천 (J싸川) ·양덕(~.값칩) ‘ 용-천(龍J 11)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 렇게 하여 3월 l일에 점화된 독립 만세의 불길은 날이 갈수록- 전국 각지 로 파급되어 한국 역사상 최대의 민족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은 독립 운동의 전국적인 파급은 우선 천도교나 기독교의 조직을 통한 경우, 또 고종 황제의 인산 배관(잭뼈)차 상경했던 지방인이나 학생이 귀 향하여 계획한 경우, 인근 지방의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계획한 경우 등 여러 가지 경로에 의하여 3월 중순까지는 전국 13도는 물론 바다를 격한 제주도 (濟州鳥)에까지 파급되 었다. 이 때 파급된 만세 운동의 경 향을 보딴 대체로 다 음과같다. @ 서울에서 의주로 연결되는 서북 지방에서 남부와 동부 지방쓰로, 그리 고교통이 펀리한절도연변의 대도시에서 중소도시,읍(펀) 연(|띠) 리 (민)로 전파되어 갔다. @ 지방의 운동으로서 그 규모가 컸던 시위 날짜는 대부분 장날과 합치된 다- 이것은 거사 계펙의 누설 방지와 인원 동원이 용이한 때문인 것 같다. ® 같은 장소에서 같은 날 또는 5일, 10일 간격으로 몇 차례씩 거듭히-여 운 .. [2] 3· l독립만세운동 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