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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한 때문이었다. 한편 또 하나의 중요한 일은 독립 선언서의 작성 문제였다. 이 일은 최남선이 최린·현상윤과 의논하는 자리에서 자끼는 일생을 학자 생활로 마칠 생각이라 독립운동의 표면에 나서지는 못하지딴 선언서는 맡아 작성하겠다고제의함으로써 그에게 낙착되었던 것이다. 그 뒤 며칠 후 최남선은 자기가 기초한 독립선언서 초안응을 최린에게 전달 했다. 그러나 한용운은 독립운동에 직접 책임질 수 없는 최남션이 선언서를 짓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고, 자기가 짓겠다고 나섰으나 그 때는 이미 선 언서의 손질이 끝난 뒤였다. 지금 전하는 독립선언서의 뒤에 있는 공약3장(公 約三章)은 한용운r이 추가한 것이라고 한다. 그 뒤 독립선언서의 원고는 오세 창을 통하여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 인쇄소(팝成社印떼所) 사장 이종일 에게 전달되었다. 그리고 이종일은 공장 감독 김홍규와 함께 2월 27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 지 2만 1천 매를 인쇄하였다. 인쇄가 완료된 선언서는 경운동 (앓킬洞) 이종일 의 집으로 운반되어 28일 아침부터 여러 사람에게 분배되어 전국 각지로 전달 하였는데, 그 대략을 보띤 다음과 같다. 천도교측의 안상덕(安채德) 에게 2·3천매, 김홍렬(金파烈)에게 약 3천매, 인종익(印宗益)에게 2·3천매, 이경섭(李景燮) 에게 약 1천매, 기독교 측의 김 창준과 함태영에게 2·3천매, 불교 측의 한용운에게 약 l천매, 학생 측의 김성 국(金成國)에게 2천매 내외를 주어 서울과 지방에 배포하게 하고, 나머지는 천도교 직원 이관(李밸)에게 주어 며칠 동안서울에 살포하게 하였다. 이 중에서 인종익은 전라도와 충청도, 안상덕은 강원도와 함경도, 김홍렬 은 평안도, 이경섭은 황해도, 김창준은 평양과 선천, 이갑성은 서울과 경상도, 한용운은 주로 경상도의 사찰(좋刺)을 각각 담당하여 배포하기로 하였다. 그 중 이갑성씌 지시를 받은 김성국이 숭동 예배당으로 가져간 선언서 1천 제2장_:l· l독럽만세 운동의 추진 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