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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홍식 ( ljJ싹植) ·박희도·오화영 ·정춘수(鄭春洙) · 이갑성 (李甲成)과 새로 최성모·이필주-김창준(金됩俊) 박동완(朴束完) 신석구(디l錫九) 둥이 가담 하여 16명이 서명하고, 불교 측의 한용운·백용성이 서명하여 민확대표는 모 두 33인으로 결정되었다. 이 33인의 민족대표 이외에도 거사 계획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사들이 있으나, 그들은 개인사정이나 또는 독립운동의 다음 일을 위하여 서명에서 빠졌던 것이다. 그들은 송진우,현상윤·정노식·김도 태 ·최남선·임규(林圭)-박인호(*|、파팎) 노헌용(盧憲容) ·김홍규(金弘젠) ·이 경섭 Cf채상) ·합태영·안세환·김세환(金|반煥) · 김지환(金짐!煥) · 강기덕 , 김원 벽 동 16인이었다. 처음에 독립선언은 고종 황제의 국장날인 3월 3일에 발표하기로 하였으 나, 3월 1일로 바뀌었다. 그 이유는 첫째,동경의 유학생들이 이미 2월 8일 독립선언을하였고,또국내 학 생들의 독립선언이 임박하였으므로더 연기할수가없었으며, 둘째, 국장날인 3월 3일에 거사하는 것은 붕서 (朋젠) 한 전 황제 에 대한 불경 (1 시짜) 이 라 피 하고, 국장 참관을 위하여 상경하는 수많은 지 방민을 참여시켜야 하는데, 3월 2일은 일요일이라 기독교 측에서 피하자고 하였기 때문에 결국 3월 1일에 거사하기로 확정하게 꾀었다. 그리하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중에서 서울에 있던 20여 인은 2 월 28일 밤에 제동(齊ii폐) 손병희 집에서 최종 회합을 가지고 거사 계획에 대 한 마지막 검토를 하였다. 여기서는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 꽁원에서 독 램을 선언하기로 하였던 예정을 비-꾸어 같은 시각에 태화관(泰따폐‘(=I”JJJ 館 Jz1까i) 에서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그 날 학생대표들의 연락으로 많 은 학생과 민중이 파고다공원에 모이게 되었으므로 혹시 불상사가 있을까 염 ..... [2] 3‘ l독립만세운동 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