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page

평안도 방면의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접촉에 성공, 국내의 정세를 얄리고 국내 의 궐기를 호소한 뒤에 상해로 돌아왔으니, 이것이 2월 상순의 일이었다, 이러한 해외로부터의 연락에 의한 것 이외에 국내에서는 국내대로 민족독 립을 요구하는 민중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일찍부터 세워 놓고 있었다. 그 하나는 손병 희 (係자熙) · 권동진 (柳싸행) · 오세창(따 111: ,닉) · 최 린 (崔職) 둥 천도교 측이 그것이었고, 하나는 송진우(저鎭禹) ·현상윤(玄짜 1允) ·김성수 (%性싸) 등 중앙학교( r J ’火센校) 측이 그것으로, 이들은 일본 신문 등을 통하 여 일찍부터 민족 자결주의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서울의 Y.M.C.A 또는 세브란스 병원 퉁이 직장이었던 관계로 서양인들파 접촉이 있던 박희도(朴맨造) 이갑성(깎「fl成) 등, 그리고 그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던 연희전문학교(延팬파|꺼댄校)의 김원벽 (값元 딴), 보성 (씌 -成) 전문학교의 강기 덕 (찌꼬싫) 보성 전문학교 졸엽 생 주익 (* 썼), 경성 의전의 한위건(폐(딱따), 세브란스 의전의 이용설(쑤짝냄) 둥 청년 학생층이그것이었다 이들 몇 갈래의 국내의 웅직임은 모두 1918년 12월에서 1919년 1월 사이 에 벌써 싹이 움닫기 시작하여 각각 독립운동에 관한 밀의 (密짧)를 거듭하고 있었고,특히 천도교측은앞으로 전개할운동의 3가지 원칙을이미 1919년 1 윌 상순에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l장 _3· l독렵만세 운 동의 배경 •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