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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빼앗음)함이 관청에 의해 자행되었으니 하물며 이 저수지와 관련된 수십 인들은 어떠하였겠는가? 최대시와 수십 명의 作A이 벌을 받음은 곧 수천 인 의 벌이라. 따라서 수천 인의 원성이 어찌 없겠으며 이것은 백성블에게 또한 뼈에 사무치게 하는 원한이 이-니겠는가? 이것은 쩌싸、J11il:?-T에서 지방관이 행하는 관례화 되다시피 한 침탈-행위다. 지 방관은 다수인 농민들씌 이해관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권세가와 결탁하여 이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후원자로 행동했으며 무고한 농민들을 포박 족치하 여 곤장과 물고문이라는 흑형을 가하는 일은 허다했다. 보의 축조와 수리는 자연 재해가 빈발하는 우리나라의 자연환경에서는 매우 중요한 농업정젝의 하나였다. 향촌사회의 안정은 바로 농업생산력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었 다.그래서 역대 왕들은 끊임없는 ‘바水 ·J;:業에 관심을보였고또한농업정책의 입안에 있어서도 중요딴 위치를 차지했다. 그런데도 지방관은 지망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일부 써;행家들과 결탁하여 이권의 개입에만 열중하였으 니 농민들의 관에 대한 불신과 원망이 얼마만큼 컸는지 쉽게 헤아랄 수 있을 것이다, 고종 31 년 (1984) 갑오농민전쟁의 직접적인 발생 동기가 고부군수 댐자티]의 탐학과 만석보 축조시의 노역 정발이었음을 상기하면 쉽게 이해되 리라. 이외에도 전임군수 비리는 F 원차(소나 양을 제물로 사용하지 않고 채소만 을 간단히 준비하여 지내는석전)시의 분란에 대해 한사람의 말만 듣고 십여 명을 족치하여 곤욕을 치르게 했다 하고 오히려 형 L網을 벌주었으니 여론의 비 등은가히짐작된다. 특히 봉건적 신분제 사회에서는신분은그사람의 사회적 지위될 결정했으 며, 향촌시-회는 자생적인 규율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이런 자생적인 규율은 곧 향약으로, 향약의 덕목에 그 성격이 반영되어 있듯이 극악무도한 행패를 .. [6] 한말시홍의 농민운동-[ 애l생‘19세>l 죠션왕죠의 샤회씩 상황] 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