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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갑신정변으로 개화파세력은 제거되고 정계는 민씨의 수구파기- 장악 함으로써 관료의 기강은 더욱 문란해져 탐관오리에 의한 품했談求는 극에 달 했다. 외국상품의 침푸로 인한 곡물의 대량유출 및 농촌경제의 파탄, 빈번한 자연재해의 발생 등으로 농민의 생활상은 아사상태여서 민심이 흉흉힘-과 함 께 각지방에서는 크고 작은 민란이 발생하였다. 조선시 대의 양반관료체제가 유지될 수 있었던 기본요건은 과꺼제의 공정 한 시행에 있었다- 그러나 외척세도정치가 시행되는 동안 그 제도의 문란은 극에 이르렀다. 즉 과꺼시험장은 마치 시공장시를 연상시킬 정도로 문란했으 며 응시자의 답안지는 청탁에 의해서 결정되었으며 합격여부는 씨미 뇌물의 다가에 의해 결정되었다. 때로는 정원 이상의 합격자를 선발하여 이들 정원외 합격자로부터 돈을 받기도 하였다. 이 렇듯 과거제의 시행이 문란폐짐에 따라 뜻있는 선비들이 과거를 외면하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경향이 나따나기도 하 였다. 관료기강의 문란은 과거제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직접 관직을 매매하 는 Z훈官설職의 부패 액시 기숭을 부렸다. 이것은 빈번한 과거시행으로 합격자 를 양산시켰으나 관직의 고정화로 인한 인재등용의 한계성에 그 원인이 있었 다. 특히 대원군 집권 당시 경복궁 중건을 위한 원납전징수와 지방관아의 진 흘을 위한 의연긍정수에 문제가 있었다. 원납자가 전직관료였으면 재등용을, 현직관리이연 승진을, 왜웰의 경우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직접 판직의 길을 열어 주었다. 물론 직위 에 따라 액수의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이서 는 300∼500냥, 수령은 1만냥을 호가했디 한편 지방에서는 수령이나 협잡배가 부유한 백성들에게 원하지도 않는 낀· 術을 팔아 직첩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 럼 돈으로 사게된 벼슛을 치함벼 슬이라고 불렀다‘ 관분에서 파견되는 임시직에도 매관매직이 이루어졌으며 ………… -- [6) 한말 시홍의 농민운동-[세l쟁 19세〉! 죠션왕죠의 샤회석 상빵] 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