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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최정성 (훌표成, 1898.2. 3 ∼ ?) 최정성은 시흥군 서면 소하리(현 굉-영시 소하동) 출신으로 최호전·윤의병­ 이종원 김인환·유지호·최주환 등과 함께 같은 동리에 시-는 이정석의 탈환 사건에 적극 참가하였다. 그는 경찰의 신문조서에서 사긴의 전개과정을 “1919년 3월 2B일 오후 7 시경 연사무소 아래 많은 사람틀이 모여 있는데 최호천이 그들에게 “오늘 발 ε싸 ,'J' il!_ 경찰관 주재소로 일동이 몰려가 어제 밤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가 인지된 이정석을 찾아 오기 위하여 간다”고 하며, “지긍 이틀만으로는 부족 하니 소하리의 가리대리 주민까지도 모으자”고 제의하여, 그 동라 사람들을 모으니 약 80명 가량 되었으며, 최호천이 선두에 서서 이민을 모으고 ‘돌이 나 곤봉을 휴대하라. 만약 이정석을 내 달라고 강박하여 말포함과 같은 일이 있으띤 돌이나 곤봉으로 대헝-하라’고 말하여 최호천이 이들을 인솔하고서 합세하니 인원수기 1 백여 명이 되었다. 나는 주모자인 최호천 윤의병과 함께 주재소로 가서 이정석을 잡이-간순 사보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일본인 순사와 최호천·윤의병·이종원이 담판 한끝에 “다음날본서에 가서 석망할것이라는약속을일본인순샤로부터 받 아내댔다”라고진술하였다 최정성은 이 사건의 적극 기-담으로 인하여 대구복섬범윈애 의히-여 벌금 30 원에처하여졌다. 1919년 5월 28일 경성지망법원(짜城삐)j파따)에서 중(1f() 한 구긍자 탈 취미수죄에 따라 징역 1년 6새월을 선고받고, 1919년 7월 31 일 경성복심볍 윈에 항소하여 유죄 판결(형량은 알 수 없다)을 받았다‘ 이어 고등-법원에 상 고함으로써 대구복심법원에 이관되어 1919년 12월 19일 :10원의 벌긍형을 선고받았다함 …… -- 151 팡영지역의 3· l톡법만써운동 찌----철 언액룰 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