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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최효천 (훌浩天, 18~19. 1. 9 ∼ 1960. 4. 12) 경기도 시흥(뻐興)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시흥군 서연 소하리 (1띠|띠 所 F및) 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배 재고동보통학교(J얀材l돼쌓센퍼찌校) 재학생으로 이곳에서의 꼭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7일 동리에 사는 이정석 (쑤.R:Ti) 등이 독립만세시위를 하 다가 노온사리(용밟、 'F 'I:!J 주재소에 강제 연행되었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3월 28일 밤윤의병 (Jr江얘) 동동지 5명이 앞장을서서 동리사람을모아놓 고 이정석을 구출해 오자고 제의하여 동리 주민 1 백여 명의 찬동을 얻어 길 을 떠나기로 하였다‘ 길을 떠나기 전에 윤의병은 부근 동리의 주민을 더 모집 하여 군중수는모두 500여 멍이 되었다. 3월 28일 밤에 최호천이 5백여 명을 통솔하고 윤의병이 앞에서 인솔하며 노온사 주재소를 항하였다. 이종원과 김거봉,최정성 ‘유지호 최주환 등 5명 이 최호천과더붙어 앞장섰다. 이 시위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최호천은 군중에게 “우리가 주재소를 습격 하면 정찰들이 발포할지 모르오. 각자 곤봉과 톨을 준비해 가지고 가서 만일 경찰이 발포하면 때려 부줘야 하오”라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동리 사람들은 곤봉과 돌을 준비하고 임전테세를 갖추었다. 시위행렬은 먼저 주재소를 포위 하고 “이정석을 내 놓아라”고 함성을 질렀다. 또한 군중속의 일부는 주재소 의 게시판을 넘어뜨리고 뒷벽을 파괴하는 동의 폭력 행사도 하였다. 그러나 주재소 내에서 이에 대한 반웅이 없자, 군중은 두 패로 나누어져 한 패가 최 호천의 인솔을 받아서 노옹사리 순사보를 찾아 나섰으나 실패하였다. 그는 순사가 시위 운동의 이유를 묻자 당당히 이 정석을 탈환하기 위하여 3· 1륙힐만셰훌훌휴풍*" " 특애훌흥가 ---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