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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중(白致重) ~1908 / 의병 / 건국훈장 애국장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고, 1907년 7월 '정미7조약'으로 군대까지 해산 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백치중은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8년 이강년 의진에 참여하여 선봉장으로 활동하던 백남규의 휘하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이강년 의진은 1907년 단양.제천.원주.연풍.영월.횡성.강릉.청풍.충주.문경.예천.영주.봉화.안동 등 3도 14군을 휩쓸며 일본군과 대적하였다. 1907년 7월 5일의 제천 전투에서는 500여 명의 적을 토멸하여 사기가 충천하였고 동년 9월 16일 제천 추치에서 교전하여 적 200여 명을 생포하였으며, 동년 9월 27일 죽령에서 다시 적 200명을 생포하였고, 10월 5일 단양 고리평에서 적 80명을 생포하였고, 10월 23일 풍기 백자동전투에서 다시 적 100명을 생포하는 등 경상,강원.충청 일대에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백치중은 이 일월산전투에서 백남규의 휘하에서 일본군과 치열하게 교전하던 중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200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백남규(白南奎) 1884.08.22~1970.02.19 / 의병 / 건국훈장 독립장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안동 진위대 부위로 근무하였다. 1907년 한국군이 일제의 책동에 의하여 강제 해산 당하자, 동지를 규합하여 경상북도 순흥에서 의병을 일으켜 부하 8백명을 거느리고 왜병과 접전하였다. 그때 문경의 의병장 이강년이 강원도 횡성의 봉복사에서 유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만나 뵈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이강년의 인품에 감복되어 그와 합진할 것을 결의하고 부하 8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가 이강년 의진의 우선봉으로 임명되었다. 9월 16일 추치에 복병하였다가 적 2백 명을 사로잡았다. 백남규는 좌선봉 하한서, 우선봉 권용일과 함께 추치로 가서 복병하였다가 적을 사로잡게 된것이다. 백남규는 부친이 적에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백남규가 돌아와 우선봉의 임무를 맡게 되어 다시 의진의 진용을 수습하였다. 의병장-이강년 도선장-윤용구 우선봉-백남규 우군장-변학기 우익장-정연철 1908년 6월 의병장 이강년이 적에게 체포된 뒤에는, 김상태가 의진의 지휘권을 행사하였고, 백남규는 그 일부대를 나누어 가지고 서벽.내성.아산 등지에서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죽산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8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출옥하였다. 1918년에는 상해로 망명을 기도하다가 거듭 체포되어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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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함(柳濟咸) 1884.10.26~1960.01.11 . 의병 / 건국훈장 애족장 을미의병의 정신적 지주이었던 의암 유인석의 양자이다. 부친 유인석은 을미의병 실패 후 요동으로 망명하였다가 일시 귀국하였으나 정미의병때인 1907년 음력 1월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나 불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그 후 유제함은 망명한 부친을 대리하여 국내 의병운동을 지원하였다. 1908년 2월 의암이 국내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운강 이강년에게 보내는 격려서신과 격문을 김호원과 함께 전달하여 운강의 의병운동을 고무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1908년 6월 의암이 망명한 후 가족에 대한 적의 감시가 점차 엄중하여져 국내활동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의암을 따라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여 의암의 활동을 뒷바라지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유석현(柳錫鉉) 1900.05.04~1987.08.28 / 의열단 / 건국훈장 독립장 1919년 3.1독립운동에 참가하여 활약 중 일경의 추적을 받아 같은 해 11월 만주로 건너갔다. 1920년 7월 중국 천진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여 1922년 2월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입국하였다. 1922년 12월 김지섭 등과 함께 무교동 백윤화 판사를 협박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1923년 5월을 기하여 전국 각지에서 대폭동을 일으키고 요인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전달받았다. 그는 김시현.황옥.김지섭 등 동지를 규합하여 무기반입을 모의, 북경에서 폭탄 36개, 권총 5정, 독립선언문 3천매 등을 소지하여 입국, 거사를 계획 중 밀고자에 의해 1923년 3월 15일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후 만기출옥하여 194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갔다. 정부에서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하유원(河有元) 1911.06.17~1938.07.05 / 일본 방면 / 건국훈장 애족장 1932년 3월 26일 해주고등보통학교 동맹휴학시에 주동자로 피체되었다. 그에 따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폭력행위 등 법률위반 및 건조물 손괴로 징역 8월,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1934년 2월 15일 전 협 동경지부 강동지구 협회에 가입하여 활동중에 동경경시청에 피체되었다. 1935년 10월 15일 동경지방법원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받고 장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36년 1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재수감되었다가 1937년 4월 8일 폐결핵으로 가출옥되었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