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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규(申鉉圭) 1888~1928.08.12 / 국내항일 / 건국훈장 독립장 충북 괴산(槐山) 사람이다. 1918년 경북 문경에서 광복회원인 손량윤(孫亮尹)을 만나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풍기광복단(豊基光復會)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1915년 통합하여 결성된 혁명단체였다. 대한광복회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만주(滿洲)의 독립군 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고 국내에 확보한 혁명기지를 거점으로 적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할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행동지침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개강령이었고, 각처에 곡물상을 설립하여 혁명기지로 삼는 한편 군자금 조달, 독립군 및 혁명군의 기지 건설, 의열투쟁으로서의 총독 처단, 친일부호 처단 등을 추진하였다. 대한광복회는 1918년 주요인물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르거나 사형 순국함으로서 조직이 크게 와해되었는데, 신현규는 동지들과 피체되어 1920년 6월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옥고를 치루고 나온 뒤에 다시 손량윤과 독립운동에 매진하여 군자금을 모집해 신민부에 전달하는 활동을 벌였다. 신민부는 1925년 3월 대한독립군단과 대한독립군정서를 주축으로 한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하여 통합을 추진, 결성된 단체였으며 기관지 '신민보'를 발행했다. 그는 1927년 4월 신민부(新民府) 중앙집행위원장 김좌진(金佐鎭)으로부터 일제 고관과 친일분자의 주살, 주요시설의 폭파, 군자금 모집 등의 밀명을 받고 파견된 손호(孫滸).이병묵(李丙默)과 손봉현(孫鳳鉉).윤창선(尹昌善) 등과 함께 대구.경북지방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약을 하다가 1928년 7월 일경에 피체되어 1928년 8월 12일 신문을 받던 중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