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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彩雲 玉女峯에서 可也谷 金城山에서 魯城山에서 同時에 불이 오르고 萬歲喊聲은 놀묏벌이 떠나갈 듯 地殼變動의 震動을 쳤다. 결국 榮達公은 主動者로 日警에 逮捕되어 酷毒한 獄苦를 치르게 된다. 갖은 拷問과 懷柔에도 同志들의 이름을 대지 않고 自己 單獨行動이었다고 强辯하시다 笞杖九十度의 酷刑을 當하셨다. 피투성이에 살점은 떨어지고 짖이겨져 公이 死境에 이르니 들것으로 떼어메다가 후미진 바닥에 내동댕이 쳤다. 기며 뒹굴며 城東面 三山里 疎宗宅으로 避身 二年餘 隱居하시다 鷲岩里 故鄕에 오시니 日警은 晝夜 監視 警戒로 親姻戚과 住民의 接近을 막았다. 病看도 못하여 그 때에도 笞杖의 傷痕等이 아물지 않고 구더기가 들끓는 蠅蛆病으로 數年間 또 苦痛의 連續이셨다. 田畓을 팔아 獨立運動資金으로 全 家産을 蕩盡하여 제대로 成長시킬 수 없던 膝下의 四兄弟마저 風散되고 日帝의 强占期 鬱憤에 病이 깊은 몸을 草根木皮로 근근히 延命하셨다. 多幸히도 그토록 오랜 歲月 애타게 渴望하던 祖國光復을 보시고 壬辰年 二月 二十一日 壽 七十一歲로 永眠 하시니 鄕人들은 公을 茅亭志士라 稱하여 欽仰하더라. 이와 같은 事實은 韓國獨立運動史 獨立有功者功勳錄 論山地域三.一運動史 等의 歷史的 文獻에서 빛나고 있다. 그 값진 빛 公의 愛國忠節을 永世에 기리기 위하여 裵門의 諸孫과 市民의 뜻을 모아 公의 獨立運動行狀을 추려 이 碑에 새겨 다듬고 그 功績을 높이 받들고자 한다. 西紀 一九九九年 己卯 五月 日 推進委員長 論山市長 田鎰珣 謹竪 松原 裵尙煥 謹撰 靑竹 林憲善 謹書 達城裵氏直提學公派門中 協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