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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2월31일 화요일 2 (제156호) 기 획 신라경애왕 치세의복원및 역사비정사업안내 천년왕조신라의처음과끝을이루었던지고당당한후손.박씨대족친의 역사적계승과의식의복원을꾀하고자다음과같이숭조사업을시작하 고자합니다.천백년에걸친역사의질곡에억눌려흘러나오지못한경애 왕의긴이야기를꺼내어가깝고먼 훗날의후손에게들려주고자합니다 . (가칭)신라 경애왕 치세의 복원 및 역사 비정 사업 추진위원회 ▶개요-1.숭조븡숭덕을통한박씨족친의결속도모와 후속세대에대한전통계승을지향. 2.신라박씨왕치세의복원을단계적으로집대성. 신라왕조실록(박씨10왕)의계기적편찬을도모. ▶방향-1.쟁점이많은경애왕의치세를비정한학술서적(전문논문집)1권. 2.팩션(가독성높은문체로역사사실을설명하는Version)경애왕1권. ▶내용-1.기존소개한내용과지금껏밝히지않은사안들을 학술적으로집대성. 2.경애왕의치세와포석정등의집중해부. 새로운시각과해석에의접근. 3.박씨족친의역사전승및뿌리교육을위한 사실적서사의완성븡정리. 문의:한빛신문053-588-7300븡박순교010-3502-8024 박순(1523-1589)의 자는 화숙(和叔)이요, 호 는 사암(思庵)이며,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부 친은 박우(朴祐)이고,박상(朴祥)이 중부(仲父) 이며,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박순은 어려서부 터 뛰어난 자품을 지니고 있었으며, 8세 때에 벌 써 입을 열어 사물을 읊으면 으레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하였다. 18세 때 진사과에 합격한 뒤에 곧바로 개성에 있는서경덕(徐敬德)을찾아가학문을연마하였 다 . 3 1 세 때 명 종 (明 宗 ) 이 친 히 경 서 로 시 험 을 하 였는데, 박순의 행동거지가 점잖고 논설이 정확 투철하여 여러 시험관들의 이목을 사로잡아 마 침내 장원급제하였다. 이후 성균관 전적을 시작 으로 공조 좌랑, 이조 좌랑, 홍문관 수찬과 교리 에 나아갔고, 36세 때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 다. 사가독서란 조선 시대에 문운(文運)을 진작시 키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 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사가독서를 끝낸 뒤에 검상과 사인 벼슬을 거쳐 38세 때 재 상어사(災傷御使)가되어호서지역을순시하며 백성들의삶을직접눈으로본다. 39세 때 홍문관 응교로 승진하였는데, 이때 홍 문관에서임백령(林百齡)의시호를의논해올렸 다. 임백령은 1545년(명종즉위) 을사사화가 일 어났을 때 소윤(小尹)에 가담하여 여러 사림들 을 탄압한 사람이다.따라서 박순과 같은 사림들 은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다.그런데 임백령의 시 호를 내릴 때에 왕의 외척이면서 을사사화의 주 동자인 윤원형(尹元衡)이 깊이 관여하고 있었 다.만일 임백령에게 좋은 시호가 주어지지 않는 다면, 큰 화가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때 문에 홍문관 관원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 는데, 박순이 분연히 나서서 ‘공소(恭昭)’로 정 하였다.이것을 알게 된 윤원형은 당연히 반발하 였고,박순은 결국 파직되어 나주로 잠시 돌아온 다. 몇 달의 휴식기를 가진 박순은 39세 12월에 한 산군수로나아간다. 한산 군수로 부임한 박순은 선정을 베풀어 고 을 사람들이 부모처럼 생각하였고, 공무가 끝나 면 늘 정사(亭舍)에 나가 독서로 일과를 삼았다. 그리고 41세 때 성균관 사성이 된 뒤에 사헌부 집의와 홍문관 직제학,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 하였다. 이후 이조 참의,사간원 대사간으로 자리를 옮 겼다.박순은 앞의 임백령 시호 사건에서 보았다 시피불의한사람들을미워했다. 43세 때 대사간이 된 박순은 대사헌 이탁(李 鐸)과 함께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죄를 논해 절도(絶島)로 유배시키고, 곧이어 윤원형의 죄 를 논 해 벼 슬 에 서 물 러 나 게 하 였 다 . 이 렇 듯 불 의 한 여러 사람들이 권력에서 벗어나자 백성들은 기뻐하였고, 경향(京鄕)의 선비들도 희망을 가 졌다. 박순은 44세 때 대사헌, 45세 때 예조 참판 에 올랐다.이러던 중에 박순은 부제학으로 고향 안동에 있던 이황(李滉)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 조정에 나오기를 권유하였다. 한편, 45세 때 명 종이 승하하고,46세 때 선조(宣祖)가 왕에 오른 다. 명종이 세상을 뜨자 중국에서 명종의 시호를 전하기 위해 사신들이 왔는데, 박순이 맞이하는 일을 도맡았다. 이때 온 사신들과 박순은 시를 주고받았는데,사신은 박순의 시 창작 능력을 보 고서 “송나라의 인격에 당나라의 시격(詩格)을 지녔다.”라고 감탄하였다. 또한 이어 중국에서 황태자의 책립조서(冊立詔書)를 전달하기 위해 사신을 보냈을 때도 맞이하는 일을 맡아 소임을 다하였다.당시 중국 사신을 맞이한 사람은 반드 시 제술(製述) 능력, 즉 글재주를 잘 갖추어야 했다. 박순은 다른 사람에 뒤지지 않는 제술 능 력을 갖추고 있었기에 중국 사신을 맞아 일을 원 만히수행하였다. 중국 사신들의 일을 모두 마치자 대제학에 올 랐고,고향에서 상경한 이황은 예문관 제학에 임 명되었다.이때박순이임금에게말하기를“지금 이황은 나이 많은 석학으로 제학이 되고 신은 대 제학을 맡아 위치가 바뀌어졌습니다. 임무를 교 체해주십시오”라고하였다. 임금이 대신들과 의논하여 박순의 말을 따랐 으나 이황이 다시 사퇴하여 박순이 대제학을 다 시 맡았다.이 일화는 훗날까지 미담으로 전해져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李瀷)은 븮사암능양(思庵 能讓)븯이라는 글을 남겨 박순의 어진 마음을 본 받자고하였다. 대제학에 오른 박순은 당시 문단이 부박(浮 薄)한 데로 흘러가는 것을 고치려 하였다. 당시 문단은 송시풍(宋詩風)이 유행하고 있었는데, 박순은 이러한 문단의 상황이 썩 마음에 들지 않 았다. 따라서 삼당파(三唐派)로 불리는 최경창 (崔慶昌),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 등에게 시를 지으려면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들처럼 지으라고 조언한다. 삼당파를 중심으로 많은 문 인들이 박순을 따랐기에 문단에서도 점차 당시 풍(唐詩風)이 유행하기시작하였다.한국한시사 의 흐름에서 시풍이 변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 를 갖는다.그런데 그 흐름의 물줄기를 바꾸는데 박순의역할이컸던것이다. 박순은 이후 이조 판서, 예조 판서, 의정부 우 찬성에 특별 제수되었으며, 50세(1572, 선조5) 때 우의정이 되었다.우의정에 오른 박순은 중국 연경(燕京)에 들어가 신종황제(神宗皇帝)의 등 극을 축하하였다. 중국에서는 당시 외국에서 온 진주사(進奏使)는 좁은 문을 이용하도록 하였 다.그러나박순은표문(表文),즉중국의임금에 게 보내던 외교 문서를 가지고 왔으니까 정문으 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여 이것이 정식으로 되었 다. 또한 사행(使行)을 통해 평소 박순의 명성을 들었던 많은 중국 사람들이 도로에 나와서 시를 요청하였다. 이듬해 51세 때 조선으로 돌아온 박순은 좌의 정에 올랐다. 좌의정에 오른 박순은 이이(李珥) 와 함께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길을 열어주는 일을 논의하였다. 박순 은 이이에 비해 13년 선배이다. 이처럼 박순은 이이가 비록 자신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중요한 국사(國事)를 논의하기에 합당하다 여겨 늘 함 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때문에 박순의 나이 54세 때 이이가 사직하고 돌아가자 다시 관직을 줄 것 을 임금께 요청하였다.박순은 이이의 훌륭한 학 문과 도덕을 높이 평가하여 반드시 관직에 있어 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이황에게 대제학 자리를 양보한 일과 함께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 고 있 다 . 박순은 57세 때 영의정에 올랐다. 영의정에 오 른 박순은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해나갔다. 그 중 에서 특히, 강원 감사 정철(鄭澈)이 단종(端宗) 의 묘를 개축하고 표석(標石)을 세워 제사를 지 낼 것을 요청하자 이를 허가하도록 주청한 일, 길재(吉再)의 묘에 제사를 지낼 것을 주청한 일, 성혼(成渾)이 귀향하려 하자 경연(經筵)에 입시 하도록한일등을손꼽을수있다. 6 1 세 때 함 경 도 북 부 의 6 진 지 역 에 서 여 진 부 족들이 변란을 일으켰다. 이 변란은 삼포왜란과 함께 조선 전기의 가장 큰 전란으로 기록되어 있 다.박순은 영의정으로서 당시 병조 판서로 있던 이이와 함께 비국(備局)에서 책략을 모색하였 다. 이때 이이가 탄핵을 당했는데, 여진족의 위세 는 더욱 강해져 위급하게 되자 박순이 이이가 맡 은병조판서를겸임하였다. 이이가 탄핵을 당하자 성혼이 선조에게 상소 하여 변명을 하였고,박순은 탄핵은 공론이 아니 라 하였다. 그러니까 다시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박순을 공격하며 탄핵하려고 하였다. 이때 선조 가 박순을 가리켜 “소나무와 대나무 같은 절개 와 지조가 있고 물과 달 같은 정신이 있다. 븮松筠 節操水月精神븯라는윤음(綸音)을내린다. 이 말을 통해 선조가 박순을 얼마나 믿었는지 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박순은 탄핵까지 당하자 사람들을피해강사(江舍)로물러가지낸다. 박순은 64세 8월에 휴가를 받아 영평(永平, 지 금의 경기도 포천)으로 내려갔는데, 이때 선조 는 사람을 동문 밖까지 보내어 술을 내려 전송하 였다. 14년 동안 정승 벼슬에 있던 박순이 모든 관직 을 청산하고 자연의 품에 안기려 한 것이다. 박 순은 영평의 백운산(白雲山) 기슭에 집을 짓고 살면서 시사를 일체 언급하지 않고 매일 촌사람 들과 자리를 다투며 한가롭게 지냈다.그리고 백 운계에 있는 배견와(拜鵑窩), 이양정(二養亭), 청랭담(淸冷潭) 등에 이름을 지어주는가 하면, 흥이 날 때는 지팡이와 나막신으로 소요하며 때 로는금강산등을유람하였다. 선조는 박순에게 어의(御醫)를 보내 문병하고 세 번이나 소명(召命)을 내렸으나 끝내 나아가 지않고67세를일기로생을마쳤다. 박순은 18세 때 서경덕에게 나아가 학문을 연 마하고,중년에 이황을 스승과 같이 존경하고 따 랐다. 이황은박순을칭찬하기를,“박순을대하고있 으면 한 덩어리의 맑은 얼음과 같아서 정신이 갑 자기 시원해짐을 느낀다”고 하였고, 기대승(奇 大升)은 “의리를 분석함이 밝고 또 아주 절실하 니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이라고 하였다. 박순 은이처럼선류(善類)들의추앙을받았다. 한편,박순은 시풍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문학 을 사랑한 사람으로 많은 작품을 창작했을 것으 로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 전하고 있는 한시 작 품은 총 448제 602수로 생각한 것만큼 그리 많지 않다. 박순이 남긴 시와 문장은 외손들이 보관하여 전달하였는데, 임진왜란과 같은 큰 전란을 겪으 면서 다수 망실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안타까 운 일이기는 하나 그나마 남아있는 시와 문장으 로나마위안을삼을수밖에없다. 2019년 박순의 삶을 기리며 문학박사박명희삼가적다 사암 思庵 박순 朴淳 , 송죽 松竹 의절의와수월 水月 정신을지니다 사암 박순선생묘-경기도포천시창수면주원리716-1 옥병서원:경기도포천시창수면주원리주원리688(사암선생의위패가봉안되었다.) 사암 박순선생영정 욾 욾 욾 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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