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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11월30일 토요일 12 (제155호) 기획 선비로이세상에태어나서집안에서는시(詩)와예(禮)의가르침을받고집밖에서는큰현자를얻어귀의하고 서도,마침내산야(山野)에서늙어가며이 익이나녹봉에흔들리지않고몸을닦아도를강구하며욕심없이스스로즐기는이는과연어떤사람이었을 까?손재박광일선생을두고하는말일것 이다.선생은조선시대당파싸움이가장심했던숙종때인물이다.숙종이장희빈이낳은아들인경종을세자 로삼으려는것에송우암등의서인이반대 하는사건인기사사화(己巳士禍)에스승인우암송시열이유배를가고많은선비들이당파싸움에휘말려희생 을당하는것을지켜보면서공명의유혹을 버렸다.깊은산속지리산에문수동에터를잡고산수를즐기면서유유자적하였고,때로는편지를통하여학술 교류를하고,학문을토론강학하며더나 아가호남유학중흥에초석이되었던손재선생은심경답기(心經?記),근사록답기(近思錄?記),?명성도도설(命 性道圖說),호연장문답(浩然章問答),괘변 설(卦變說),삼재일태극도설(三才一太極圖說),생음생양설(生陰生陽說),중정인의주정설(中正仁義主靜說),면 재오행설변(勉齋五行說辨),하도생성수설 (河圖生成數設),고괘선후갑설(蠱卦先後甲說)과시문(詩文)등을많은저서를남겼다.뒷날호남의유림(儒林 )이 선생의학덕(學德)과 절의(節義)를기려 광주진천사(眞泉祠)와강진남강사(南康祠)에배향하였다. 선생의 휘는 광일(光一,1655~1723), 본관은 순 천(順天), 자는 사원(士元), 호는 손재(遜齋)이 다. 고려 때 검교참찬 의정부사(檢校 핫贊 議 政 府 事) 휘 가흥(可興, 諡 靖厚)의 후손이다. 조선조 에 집현전 대제학 평양부원군 문숙공(諡 文肅) 휘 석명(錫命)의 10세손이다. 문숙공의 아들 휘 숙선(叔善)은 가정대부 동지돈녕부사이고, 손자 휘 이공(而恭)은 성균생원 창신교위이며 문행과 덕망이 높았으나 높은 뜻이 있어 벽촌(僻村)에 은거하시다가다시는세상에나타나지않았다. 생원공이 휘 의손(義孫)을 낳으니 무과 중시에 합격하여 통훈대부 남포현감으로 아들 원수(元 壽)는 통훈대부 장예원 사의(司議), 형수(亨壽) 는 부사맹(副詞猛)으로 아들 언침(彦琛)을 낳으 니 호는 만취당(晩翠堂)이며 사의공(휘 형수)의 후로 출계하였으니 이분이 손재 선생의 고조부이 며, 일찍이 제봉 고경명 선생 문하에서 학술을 하 며 세인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증조의 휘는 진 정(震挺)이니 충의위(忠義衛)요, 조(祖)의 휘는 수림(遂林)이며, 부친의 휘는 상현(尙玄)이고 호 는 우헌(寓軒)이며 증 사헌부장령이다. 소시부터 과거를 포기하고 사물의 이치(理致)를 연구하는 공부에만 전심(傳心)하였다. 우암 송시열과 더불 어 편지를 왕복하고 학문을 논하며 분변하고 드 디어 천리의 정신적 사귐(千里神敎)이 되었으니 우암선생이 자주 칭장(稱奬)하면서 유림(儒林) 이 의탁(依託) 할 곳이 있다고 하였으며, 만년의 지기지우(知己之友)로 허교(許交)하였다. 모친 은 장흥고씨(長興高氏) 처사(處士) 부민(傅敏) 의따님이요증참의성후(成厚)의손녀이다. 선생은 효종6년 을미(1655년) 9월 12일 광주 진곡리에서 태어났다. 선생을 잉태할 때 어머니 꿈에 국화(菊花)가 만정(滿廷)하더니 선생을 낳 으니 총명이 뛰어나 절대로 혼탁(混濁)한 기색이 없으니 부인(夫人)이 이미 세상에 뛰어난 유일 (遺逸)의 덕(德)이 있을 줄 알고 있었다. 7~8세에우헌공(寓軒公)옆에서서사(書史)를배 울 때에 경발(警發)의 취지(趣旨)가 있게 되니 우헌 공이크게기특하게여기고명리(名利)스러운학문 에는 얽매이지 않음을 짐작하고 소학을 가르치니 이로부터 효제(孝悌)의 도를 듣고 주선(周旋)과 대 응(對應)하는행동이소년의법도에부합하였다. 우헌공이 병이 있으면 선생이 반드시 모시고 앉아서 곁을 떠나지 않고 부친이 진지를 드시면 따라서 밥을 먹고 부친께서 잠이 드신 후에야 비 로소 잠을 청하였다. 일찍이 서화(書畵)에 공력 (工 力 )이 있 어 보 는 것 마 다 모 사 (摹 寫 )하 니 우 헌 공이 보고 중지시켰더니 그 후에는 선생이 단념 하시고 다시는 착수하지 아니하였다. 유년시절 (幼年時節)부터 능히 부모 섬기는 도가 극진함이 여차(如此)하였고 성장 후에는 사자(四字)와 근 사록(近思錄)을 가정에서 학습하여 상세히 반복 하여 체득(體得)하였다. 우헌공이 본래 역학(易 學 ) 에 통 달 하 였 는 데 선 생 이 부 모 섬 긴 틈 을 얻 어 역학(易學)의 미묘한 뜻을 질문하고 또 계몽역통 (啓蒙易通)과 태극도정몽(太極圖正夢) 등 여러 가지 서책(書冊)을 참고로 연구하고 음양왕복 (陰陽往復)하는 이치와 팔괘소장(八卦消長)하 는 변동(變動)에 거의 그 오묘(奧妙)한 이치(理 致)를 해득(解得)하였는데 당시 선생의 연세가 아직 20을 넘지 않으니 원근 인사(人士)가 선생 이 조성(早成)하여 명성(名聲)이 날로 높아짐을 감복(感服)하지않은이가없었다. 숙종3 1677년(丁巳) 선생이 23세 때에 우헌공 의 명(命)으로 우암 선생을 봉산 유배처에서 제 자의 예(禮)를 올리고 뵈오니 그 당시 우암선생 이 군흉배(群凶背)의 모략(謀略)으로 귀양 와서 그 곳에 계시는 때였다. 선생이 이미 제자의 예를 마치고 평소에 의심난 바를 반복 질문하고 대학 격치(大學格致)의 학설과 중용미발(中庸未發) 의 뜻 을 변 설 (辨 說 ) 하 여 정 미 (精 微 )한 곳 에 도 달 하니 우암선생이 그 총명하고 조성(早成)함을 기 뻐하여원대(遠大)한뜻으로권면하였다. 선생이 17~8세부터 이미 성리학에 유심(留心) 하다가 엄격(嚴格)한 선생을 만나서 의지하여 돌 아가게 되니 개연(慨然)히 정로(正路)에 입각 (立脚)할 뜻이 있어 그 진퇴(進退)의 방법이 반 드시 궁리(窮理)하고 거경(居敬)하여 요제(要 蹄)로삼았다. 박공(朴公) 중회(重繪)는 선생의 족질(族姪) 이다. 명민(明敏)하고 호학(好學)하므로 호남에 서 저명(著名)하였는데 선생과 더불어 경서(經 書)를 강론(講論)하고 의리(義理)를 토의하여 조금만 마음속에 거리낌이 있으면 반드시 스승에 게 질의하여 충분히 의심이 없는 후에야 그치게 되었으니 옛적에 이르기를 『호학(好學)하고 게 으르지 않고 명확치 않으면 중단하지 않는다.』함 은참으로선생을칭(稱)함이다. 수년 후에 당화(黨禍)가 조금 풀리고 우암 선 생이 해배(解配)되어 고향에 돌아가게 되니 선생 이 충청도 화양에 왕래하면서 그때 깨닫지 못한 뜻을 질의하였다. 대개 성명(性命)의 은미(隱微) 한 이치(理致)와 사물의 당연한 법칙으로부터 예 가(禮家)의 의심난 곳에 이르기까지 혹시라도 해 득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모두 스승에게 질문하 고 논의한 바가 무릇 정예(精詣) 자득(自得)한 맛이 많았으니 이제 크게 스승의 장허(奬許)를 입었고, 요중원(饒仲元)의 사리본말(事理本末) 의 논설(論說)에 대한 실언(失言)을 반박하니 우 암선생께서 극찬하시면서 이르기를 『명백하고 정 밀하여 물을 부어도 새지 않는다.』하더니 우암선 생께서 조정의 명으로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교 증(校證)할 때 참강(參講)하여 교정하고 또 주역 과 고경(古經)을 교정한 후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 올라가 상달(上達)하기를 『신 (臣)의 문인 중 박광일(朴光一)이 역학(易學)에 연구가 깊은 고로 같이 상의하고 증(證)하였다.』 하니문인의소중히여김을받음이이와같았다. 1689년(己巳) 세화(世禍)가 재기되어 우암께 서 제주로 유배될 때 선생이 안여해(安汝諧), 박 중회(朴重繪)와 더불어 나루터에 가서 배송(陪 送)할 때에 때마침 찬바람이 불어 산사(山寺)에 서 수 일간 유숙(留宿)하면서 선생이 여러 군자 (君子)와 같이 의심난 바를 논란(論難)하고 자기 가 저술(著述)한 호연장문답(浩然章問答)과 괘 변설(卦變設)을 보여드리니 우암선생께서 매우 감복하는 뜻을 보였는데 괘변설에 더욱 상세히 설명하신 것을 보시고 대개 괘변설 뜻 속에 어느 괘(卦)가 어느 괘로부터 왔다고 이른 것은 두 괘 가 기수(奇數)와 우수(偶數)의 왕래(往來)한 것 으로써 의심이 있는 바인데 선생이 화양(華陽)에 서 진배시(進拜時)에 송괘(訟卦)와 무망괘(無妄 卦 )를 제 출 하 여 예 (例 ) 를 삼 아 증 거 하 였 더 니 우 암선생이 오히려 미진한 곳이 있어 서신으로써 물어보니 선생이 드디어 10여 괘를 열거하여 강 유내왕도(剛柔來往圖)를 만들고 또 그 밑 에 적 은 논설(論說)을 지어 밝히며 이른바 괘변설이라는 것이 이것저것이다 하고 하니 우암께서 극히 깨 달은 바가 있었다고 하였다. 그 후에 제주에서 수 차 서신으로 반복의 의견을 보이고 정주(井洲)에 서 최후의 왕명이 있어 선생이 수암(遂庵) 권상 하(權尙夏)와 같이 들어가서 고별하니 우암선생 이 권공(權公)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괘변(卦 變)의 뜻을 오직 사원(士元, 손재)의 말이 가장 명확하니 아마도 신고창(申高敞)의 강론과 일치 한다.」고하였다. 선생은 우암의 춘추의리사상의 본질을 올바르 게 이해하고 우암의 화이론(華夷論)의 기준이 지 역이나 민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있음을 강조하였으며,명(明)의 멸망으로 인하여 없어진 문화적 도통(道統)을 조선이 잇고 있다는 소중화 론(小中華論)을 제시하여 조선의 높은 문화에 대 한민족적주체성과문화적자존의식을밝혔다. 선생이 소시부터 명리(名利)에 급급하지 않고 다만 노친(老親)이 집에 계시고 집안이 빈한하므 로 혹시 세속에 따라 과거(科擧)에 응하기로 하 였으니 1689년(己巳) 세변(世變)이 있는 후부터 다시는 나아갈 뜻이 없고 일체 세상일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두문강학(杜門講學)하시면서 세 상을 마칠 계획이었다.그때에 우헌공의 연세가 6 순을 지내니 선생이 조석으로 시봉(侍奉)하시되 얼굴을 어기는 일이 없고 가정이 극빈하여도 마 음대로 봉양하면서 오직 그 뜻을 맞추었다. 우헌 공은 본래 친구의 강설(講說)을 즐겨하시므로 원 근 친우가 조석으로 항상 만좌(滿座)하니 선생이 힘껏 접대하면서도 가정이 곤란하였으나 사양치 않고 서적(書籍)을 열람하여 적은 말이라도 다시 이야기할 만한 말이 있으면 반드시 우헌공을 위 하여 나아가 말씀드리고 그 강론의 자료로 하니 우헌공이대단히즐거워하였다. 우헌공은 일찍이 목기(木機)로 혼천의(渾天 儀,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관측하였던 기구)를 만 들어 선생에게 보이시니 선생이 대(代)로써 그 제도를 넓혀 남북극 출입도수(南北極 出入度數) 를 표시하고 황도적도(黃道赤道) 경위(經緯)의 이치와 일월성진(日月星辰)의 운행과 춘하추동 의 추이(推移)가 한번 도는 사이를 분명하게 밝 히니 이는 모두 선생이 오직 받은 효도에서 우러 난 것이므로 세상 사람들이 혹 중국 서산(西山) 의구봉(九峯)과같다고하였다. 1693년(癸酉) 우헌공의 상사(喪事)를 당하였 는데 병환 중에 있을 때 선생이 손가락을 잘라 피 를 드려 수일간을 연수(延壽)케 하였고, 상제(喪 制)를 가례(家禮)와 같이 하고 애경(哀敬)이 극 진하시었다. 우헌공 장지(葬地)가 집에서 5리가 되 는 데 선 생 이 매 일 성 묘 하 되 혹 탈 것 이 없 으 면 도보로가서살피며3년을마치셨다. 1696년(乙亥) 탈복한 후 동지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실로 용렬(庸劣)하니 지금에 와서 부사(父 師)의 교훈을 받는 길을 잃었으니 만일 충분한 힘 이 없 으 면 오 당 ( 吾 黨 )의 버 린 사 람 이 될 것 을 면 할 수 있으랴.”하고 이로부터 더욱 근면(勤勉)각 심(刻心)하며 날마다 부지런히 원근 친구들이 선 생을 표준(標準)으로 삼고 호남 학자들이 매일 선생에게 진배하여 의심난 뜻을 질정하였다. 그 때 선생의 연세가 이미 노경(老境)에 이르렀는데 자당 고부인을 모시고 계시면서 어린 아이들과 같이 행동하면서 일기가 추울 때에는 고부인의 방에서 모시고 혹 방이 덥지 아니하면 반드시 몸 소 땔감을 가져다가 불을 넣고 비록 야심(夜深) 중이라도꺼리지않았다. 1699년(己卯)에 벽계 김창옹(檗溪 金昌翁)이 사람을 아는 것을 논하면서 마음으로 알고 지각 (知覺)으로 아는 것이 같지 않음이 있다 하여 지 각으로써 마음의 지(知)에 속한다. 하여 분별하 는 것으로써 지각(智覺)의 앎에 속한다 하니 시 골 학도들이 혹 선생에게 와서 질문하는 이가 있 었으니 선생이 글 한 장으로써 변명(變名)하였으 니 대강 이르되 “김벽계(金檗溪)가 말씀한 심지 지지(心知智知)의 두 개의 학설이 있다고 한 것 은 우매한 내가 감히 알 바가 아니라 성품 가운데 지혜(智慧)는 분별함을 맡는다 하여 각각 묘맥 (苗뭏)이 있어 도리어 심성으로 하여금 두 가지 쓰임이 있다고 이를 소냐”하니 수암(遂庵)이 보 시고이르기를정당한논리라고하였다. 1701년(辛巳) 또 익위사사직(翊衛司侍直)을 제수하나 끝까지 왕명을 어기는 것이 미안하기로 사은(謝恩)하고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상경하여 보니 관(官)이 선생이 오지 않을 줄로 알고 이미 체직(遞職)하였다. 선생이 재경(在京)시에 농암 (農巖) 김창협(金昌協) 저사(邸舍)에 나가보고 종일토록 강학(講學)하고 부지중에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며 말씀하기를 “그전에도 논학(論學)의 문자를 보고 이미 식견(識見)이 정명(精明)함을 알고 있으나 이제 와서 또 받들어 의용(儀容)을 살펴보니 과연 그 소견이 들은바가 틀림없다.”하 고 또 이 르 되 “정 관 (政 官 ) 이 경 솔 하 게 체 직 하 여 조정에서는 형(兄)의 형편이 어떤지 조차 알지 못하니참으로애석한일이다.”고한탄하였다. 1705년(乙酉) 어머니 상(喪)을 당하니 전과 같 이 집상(執喪)하고 1711년(辛卯) 67세 때 지리산 문수산으로 들어가 문수동(文洙洞)에 복거(卜 居)하니 문수동은 섬진강 상류에 있어 종전부터 강산의 승경(勝景, 뛰어난 경치)으로 이름난 곳 이었다. 선생이 친제(親弟) 광선(光善)과 같이 은거(隱居)한 곳으로 정하고 매일 여러 학자와 같이 서적을 강론하시며 풍월을 읊으며 유연(悠 然)히세상을벗어날생각이었다. 1713년(癸巳)에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제수하 였으나 병환으로 불취하였다. 1714년(甲午)에 선 생이 문수동에 계신지 4년이 되었는데 가족들이 수토(水土)가 맞지 않아 문수동으로부터 광주 고 향으로돌아왔다. 1715년(乙未)에 호남 학자들이 천리(天理)가 균등하게 부여함을 논하여 이르되 금수(禽獸)도 오륜(五倫)이 있다하니 대개 중용(中庸)의 주 (註)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선생의 아우 참봉 광 원(光元)이 강릉(江陵)에 있으면서 서신으로 질 문하니 선생이 답서로써 변론하여 대략 이르되 이 말은 어떤 사람이 착각하였는지 알 수 없 으 나 이것은 반드시 하늘이 부여한 성품이 된다는 말 에 의거하여 한 말 같으나 자사(子思)께서 사람 과 동물을 논한 것은 다만 그 일원(一原)의 이치 에 의하여 말한 것이니 만일 각각 부여한 성품이 되는 고로 사람과 동물이 부득불 달라서 스스로 통하고 막히고 온전하고 편벽(偏僻)됨이 아니 한 것이다. 또 이르되 맹자께서 말씀하기를 개의 성 품이 소의 성품과 같으면 소의 성품이 사람의 성 품과 같으랴 하시니 여기서 본다면 이치가 개에 있으며 개의 성품이 되고 이치가 소에 있으면 소 의 성품이 되는 것이니 어찌하여 개와 소도 인의 예지(仁義禮智)가 있어 사람의 성품과 다르지 않 다고 할 수 있으랴. 또 이르되 금수(禽獸)도 오륜 이 있으면 그 기운이 막히지 않고 오히려 개유(開 喩 )할 만 한 이 치 가 있 는 것 이 니 그 렇 다 면 성 인 (聖人)들이 반드시 선(善)을 하도록 할 터인데 그 품 절 을 하 것 은 특 히 말 하 기 를 소 는 밭 을 갈 고 말은 태우고 개는 밤을 맡고 닭은 새벽을 맡는다 할 뿐이다.라고 하셨으니 대개 그 이치를 보는 것 이 적실(適實)하므로 말로 발표한 것이 이와 같 이분명하였다.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가 이 글을 보고 이 르되 “선생의 소견이 명쾌(明快)하여 읽을수록 시원스럽다.”고하였다. 1717년(丁酉)에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를 제 수하니 선생이 허명(虛名)으로 은총(恩寵)을 그 르치게 하였으니 마땅히 분수에 넘치는 직책(職 責)을 외람되게 받을 수 없다고 누차 상소(上疏) 하셨으며, 제4차 상소 중에는 우암이 무고(誣告) 당 한 것 을 변 명 하 고 거 듭 토 복 (討 復 ) 할 뜻 을 진 상(陣上)하였으니 대개 거년에 이세덕(李世德) 이 우암을 무고하고 극히 대의지설(大義之設)을 악평하였으므로 선생이 상소 중에 부득불 1차 해 명한 것이 상소가 미쳐 올라가기 전에 체직되어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를 제수하니 또한 나 가지아니하였다. 1720년(庚子)에 숙종께서 승하하시니 이로부 터 조정에 일이 많았고 소명(召命) 역시 끊이었 다. 1722년(壬寅) 겨울에 장암 정호(丈巖 鄭澔)가 관북적소(關北謫所)로부터 무안 지도로 이배할 때 진곡(眞谷)을 지나게 되니 선생이 영접(迎接) 하시고 경지(經旨)를 강론하며 밤새도록 쉬지 않 았는데 그때 화(禍)가 빈번하여 사람들이 겁을 먹고 지내고 있는데 양 선생이 잠시라도 상대하 여 강학을 하니 그 도의(道義)의 합치됨을 사람 들이칭탄(稱歎)하지않은이가없었다. 1723년(癸卯)에 조정에 가득 차 있는 무고(誣 告)가 위로 연원(淵源)에 미치어 마침내는 도봉 서원(道峯書院)을 철폐하는 조치가 있으니 선생 께서 마음이 상하여 이르되 “홍수(洪水)의 화 (禍)가 이에 이르러도 막은 이가 없으니 동방(東 方) 사람들이 오랑캐가 금수가 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고?”하였다. 그 해 겨울에 간암(艮庵) 이공이영암적소에서 관서로 이배할 때에장성으 로 나아가 이별코자 하니 간암이 화(禍)가 그치지 않음으로 방문객을 사절코자 하니 선생이 정색 (政色)하여 이르기를 “화복(禍福)은 천명(天命) 이니 어찌 도리(道理)가 없는 것이랴?”하니 간암 이 안색을 고쳤다 한다. 장성에서 돌아오신지 수 일 후 병에 걸려 청사(廳事)에서 별세하시니 1723 년 12월이었다. 별세 전날 친히 우인에게 답서하 고 별세 당일에병세가이미 위독하였으나정신이 오히려 착란(錯亂)하지 않고 가인(家人)들이 부 축하면서눈물을흘린 이가 있으며선생이서서히 말씀하시기를 주야(晝夜)의 이치(理致)로 타이 르고 조용히 별세하니 69세 였다. 다음해 병오일 에광주북편정광산사좌에안장하였다. 선생은 우암의 춘추의리사상의 본질을 올바르 게 이해하고 우암의 화이론(華夷論)의 기준이 지 역이나 민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 있음을 강조하였으며, 명(明)의 멸망으로 인하여 없어진 문화적 도통(道統)을 조선이 잇고 있다는 소중화 론(小中華論)을 제시하여 조선의 높은 문화에 대 한민족적주체성과문화적자존의식을밝혔다. 손재선생께서 호남유생을 대(代)하여 우암과 동춘당의 문묘배향을 청하는 상소와,1723년에 정 암 조광조 선생을 주벽으로 하는도봉서원에서 정 적의 시비로 우암선생의 위패가 출묘되자 , 노년 에 불구하고 호남유생을 이끌고 정암의 애군(愛 君) 단충(丹忠)과 도동합덕(道同合德)임을 강조 하여 국가의 원기를 위하여 복향 할 것을 상소하 는글에서임금을섬기는도리가잘나타있다. 호남유학은 하서 고봉 은봉 수은 등 16세기 전 성기 이후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된 호남의 학문 이 17세기 손재 박광일 선생과, 19세기 노사 기정 진 선생께서 호남유학을 중흥하기까지에 풍서 이 민보가 말하였듯 손재 박광일 선생이 중흥의 초 석이되었다하겠다. 선생이 남긴 손재집이 지난 해 말 한 국고전번 역원·전북대학교 학국고전학연구소·학국고전문 화연구원의 노력으로 국역 발간되어 선생의 높은 학덕과 절의 정신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어 무엇 보다 기쁘다.그러나 선생에 관한 학술 논문 한 편 이 없다는 점은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더 연구 발 전하여 선생의 정신이 훗날에도 계속 이어져 많 은사람들이교화되기를기대해본다. 그리고 광주광역시 광산구는 지난 2008년 광산 구 산정동에서 시작해 하남산단 뒤편을 지나 안 청동에서 끝이 나는 총 길이 5367m의 긴 도로에 ‘손재로’라 명명하여 지나는 길손들에게 손재선 생의 고귀한 삶을 전하고 있어 다행이다. 이에 본 보에서는 다음호에 국역 손재집에 대해 소개해보 고자한다. 호남유학중흥에힘쓴손재박광일선 생 선조 유지를찾아븣 선생이선원세계(璿源世系) 손재선생재사(齋舍) 진양재(眞陽齋)와묘역(광주광역시광산구임곡연동길106-87).선생의재사(齋舍)의대문은세심문(洗心門)이 다.이는선생이만년에지리산문수동에있으면서항상 마음을깨끗하였기에지금도주변암벽에‘洗心’두글자가선명하게남아있다. 선생의생애(生涯) 지리산 문수동 계곡에 바위에 두글자(洗心)가 선명히 새겨 져뭇사람들을동화시키고있다. 선생의묘소(진양재옆). 지난13일손재선생의높은학덕을기리는추모제향이진양 재에서 봉행되었다.(사진 제관 왼쪽부터 초헌관 봉수, 아헌 관성수,종헌관종원,축관학수,집례철승順) 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