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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이루어낸 세계전쟁사에 빛나는 업적이기도 하다. 맥아더는 제1해병사 단과 제7보병사단을 주축으로 제10군 단을 구성했다. 이 중 국군 제1해병연 대와 제17연대가 인천상륙작전에 참여 했다. 동시에 제7보병사단에는 카투사 8천 명이 배속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새롭게 편성된 美 제10군단장 아 놀드 장군은 태평양지역 상륙작전에서 경험을 쌓은 인물이었다. 상륙작전에 는 美 제7함대가 주축이 된 유엔군 260 여 척의 함정이 동원되었다. 작전은 총 3단계로 1단계는 월미도 점령, 2단계 는 인천 해안에 교두보를 확보한 후 인 천지역 점령, 3단계는 한강을 건너 서 울을 향해 진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리고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9월 27일 서울 중앙청 게양대에는 한국 해병대 에 의해 다시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수 도 서울 탈환에 성공한 것이다. 냉전 종식 이후 공개된 소련 극비문서 들을 보면, 마트베에프 장군을 북한에 군사 연락관으로 파견하여 6·25전쟁 상황을 상세히 보고받고 필요한 작전 지시를 내리고 있던 스탈린조차도 인 천상륙작전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김일성과 북한 주재 소련대사 스티코 프도 이러한 작전 가능성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인천상륙작전 직후 1950년 10월 1일 스탈린이 스티코프와 마트베에프 장군 에게 보낸 극비 전문에는, 이 작전은 인민군을 궤멸시켰을 뿐만 아니라 소 련 군사고문단을 통해 직접 작전을 지 시하고 있던 스탈린도 완전히 패배시 켰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인천에서 패배한 후 스탈린은 두 번의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원산항 앞바다에 약 2천 개의 기뢰를 설치할 것을 소련 군사고문단에 지시했다. 이 기뢰 설치로 인하여 유엔군의 원산 상 륙이 10일간이나 늦어지기는 했지만, 스탈린은 이미 인천에서 당한 패배를 만회할 수는 없었다. 호국용사들의 희생과 6·25전쟁의 교훈 인천상륙작전은 피·아간 수많은 희생 자를 냈지만, 작전의 성공은 수많은 생 명을 구하기도 했다. 어느덧 6·25전쟁이 발발한 지 70주년 을 바라본다. 호국의 의지로 전선을 지 킨 참전용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 록 창공에서, 육지에서, 바다에서 대 한민국 수호를 위해 앞장선 이들의 땀 방울을 기억하자. 5.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 6. 월미도에 상륙한 국군 2사단 17연대 장병들 7. 인천항에 정박한 제31군단 5 6 7 06 07 Vol.164 2019 Septemb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