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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이공의 휘는 윤호인데 명문 고족이며 경창부군 휘 선재 호 필문공의 16세손이요. 기미의거에 광주의 주동인물로 수백명의 군중을 선두에서 지휘했던 휘 주상의 장남이다. 공이 고종 무술 1898년 8월 3일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재질이 청수하였고 자라서는 우월한 성적으로 광주 숭일학교를 졸업하여 학식이 밝았다. 1919년 3.1운동의 여파가 방방곡곡에 확산됨에 공은 약관의 나이로서 유계문 최경동 김금석 여러 동지 및 아우인 도호와 더불어 독립선언문을 각처에 배포하여 농민과 학생들을 선동하여 만세장소로 인솔하다가 체포령이 내림에 1년 이상을 피신하였으므로 권석판결로 7년을 언도받았고 그 후 다시 독립거사에 필요한 군자금을 한준호 정용탁 이준용 등과 함께 모금하던 중 왜경에 피체되어 징역 3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마친 뒤 후유증으로 1931년 7월 23일에 세상을 마쳤으니 나이 33세였다. 이 어찌 개탄스럽지 아니하랴. 비는 안동김씨요, 배는 강릉유씨인데 장은 승두 차는 승태 승은 계는 승휘이다. 손에 박휴인 휴찬 휴일 휴요. 증손은 병철 병오이다. 아! 공이여, 옛적 임진왜란에 위국진충하여 명전천추하는 이가 있었는데 공이 만약 그때에 태어났으면 어찌 이에 이르지 못하였으리오. 비록 만시지감은 있으나 1986년 12월 관계법령의 규정으로 독립유공자의 표전을 받아 충혼을 달랬고 오늘날 빗돌에 공적을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