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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 박상진(朴尙鎭) 의사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기백(琪伯), 호는 고헌(固軒)이다. 1885년 1월 22일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박시규(朴時奎)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백부 박시룡(朴時龍)에게 출계했다. 한말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를 만나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었으며 양정의숙에서 법률과 경제를 공부하며 신학문을 받아들였다. 의사는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해 평양지원에 발령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고 국내외에서 동지들을 규합했다. 1911년 중국에서 신해혁명을 목격하고 조국 독립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1912년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와 안동여관(安東旅館)을 설립해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고 1915년 8월 25일 대구에서 한말 의병전쟁계열과 계몽운동계열의 독립운동가를 연합해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했다. 광복회는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해 일제와 전쟁을 벌여 독립을 달성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의사는 총사령을 맡아 '비밀.폭동.암살.명령'의 투쟁 강령을 수립하고 광복회를 군대식으로 편제했다.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대했으며 국내외에 활동거점을 설치하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광복회원들과 함께 대구에서 자금을 모집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나 광복회의 투쟁 역량 강화를 위하여 전국의 부호들로부터 의연금을 모지바고, 민족적 각성을 일깨우기 위해 친일파를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18년 2월 생모의 장례에 참석하였다가 체포되어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박상진 의사는 1910년대 독립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1910년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가 시행되는 국내에서 독립전쟁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덜성하고자 했던 선각자였다. 의사의 독립운동은 한말 국권회복운동이 3.1운동으로 계승되는 원천을 제공했으며, 광복회를 통해 전개했던 의열투쟁은 1920년대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투쟁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했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