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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尹世胄) 1900.6.24. ~ 1942.6.3. 독립장(1983) 밀양시 내이동 881 이곳은 석정(石鼎, 石正) 윤세주 열사가 태어나 어린 시절 민족의식을 키우며 동지이자 친구이며 형인 약산 김원봉과 뛰어놀던 곳이다. 1919년 3.13 밀양면만세운동을 주도한 뒤 중국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에서 약산과 만나 의열단 창립의 주역이 되었다. 1920년 제1차 국내기관 총공격거사 당시 가장 어린 나이임에도 자원하여 국내로 잠입하였으나, 체포되어 7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27년 출옥 후 신간회 밀양지회 총무간사로 활도하다 1932년 재망명, 약산과 재회하여 조선혁명군사 정치간부학교 1기 졸업 후 2,3기생의 교관으로 후진을 양성하였다.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민족혁명당의 영혼'으로 일컬어졌으며, 중일전쟁 중 대적선전방송 활동 및 조선의용대 창설에 크게 기여하였다. 1941년 이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정치위원으로 약산 김원봉을 대신하여 화북지대를 통솔하였다. 석정은 최후의 결전, 밀양아리랑을 개사한 독립군 아리랑 등을 통해 조선의용대원들을 격려하여 '조선의용대의 영혼'으로 불려졌다. 1942년 일제의 소탕전에 대응하여 반소탕전을 전개하다 태항산 장자령에서 순국한 석정 열사는 중국 한단시 진기로예열사능원에 잠들어 있으며, 열사의 초장지인 석문촌에는 '조선의용군열사기념관'과 '한중우호의 숲'이 조성되어 매년 무궁화 꽃이 연화산 자락을 물들인다. '약산 김원봉의 지혜의 주머니'로 불려진 석정 윤세주는 '살아서는 존엄을 지키고 죽어서는 거룩한 명성을 후세에 남긴 인물'로 평가받으며, 이육사 시의 '청포 입고 찾아오는 손님'으로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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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생가터 안내판이 좀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