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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 선생의 독립운동 활동범위는 실로 광범위했다. 국어학자가 아니면서도 민족혼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지켜야 한다는 신념으로 조선어학회 회원이 되어 학회 지원에 앞장섰다. 3.1 독립만세운동 이후 한글의 명맥을 잇기 위해 1921년 조직된 조선어학회는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이병기 등 당대 최고의 국어국문학자들 뿐 아니라 안재홍 김도연 등 쟁쟁한 독립운동가들이 결집한 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이었다. 1939년부터 한국어 말살정책을 강화한 일제는 1942년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을 준비하던 조선어학회 회원 33명을 검거, 투옥했다. 편찬 자금 3천원을 내놓은 선생도 수감돼 재판을 받았다. 더욱이 선생은 혓바닥에 대침을 맞는 극악무도한 고문을 당해 후유증으로 발음을 제대로 못하는 큰 고통을 겪었다. 이렇듯 선생은 독립을 위한 것이라면 일신상의 안위를 생각하지 않고 과감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거액을 기어이 희사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독립운동사 자료에 따르면 선생은 모두 4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집안의 막대한 재산이 독립운동에 쓰여 해방 후 토지개혁 때는 땅이 없었다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김자동 선생은 회고록에 쓰고 있다. 정부는 송재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일유재 선생의 건국훈장과 함께 우리 고장에 영원히 새겨질 충의정신의 상징이라 하겠다. 해방정국에서 선생은 인촌, 고하, 해공 신익희, 유석 조병옥 선생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을 창당, 이승만 박사를 지지했고 대한민국정부 수립에 공헌했다. 선생은 제2대 전북지사를 지낸 후 6.25 동란 중 납북되어 북한 땅에서 별세했다. 울산 김씨와 결혼한 선생은 4남 4녀를 두었다. 장남 홍 선생은 종가의 고택을 전주시에 기증했다. 이 고택은 전주향교 인근에 원형대로 옮겨져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전주전통문화연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독립유공자의 집〉이라는 표지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송재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정신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이 기적비는 전북문화원연합회에서 주관하여 세운 것임을 밝힌다. 2019년 5월 기미독립만세운동 100주년에 원광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나종우 글을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