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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에 부는 변화의 바람 우리야말로 혁명가! 1923년 1월 김원봉은 류자명의 소개로 만난 단재 신채호에게 의뢰하여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해 받고 의열단의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선언문은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에 널리 배포되고 일본에까지 배송 살포되기도 하였다. 선언문의 발표로 단원들의 사기와 자부심은 크게 양양되고, "우리야말로 진정한 혁명가"라고 자처하게도 되었다. 그 후로 의열단은 중국을 비롯하여 러시아.일본.국내 등 각처에 하부기관을 설치하여 지역 거점을 확보하면서 활동반경을 넓혀갔다. 1923년 상반기만 하더라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방면, 일본의 도쿄.고베.오사카.요코하마 등지로 단원을 파견하여 활동구역으로 삼았다. 중국도 관내(關內) 지역으로 국한되지 않고, 만주는 물론 대만.몽고로까지 활동권이 확대되었다. 또한 의열단이 고강도의 암살파괴운동으로 이름을 떨치니 독립운동 진영의 여러 계열.세력에서 그 명성과 실행력을 탐내어 제휴 상대로 삼거나 포섭하려 했다. 그런 가운데 1922년경부터 단원 수가 급증하여, 1923년에는 최소한 150명 내외의 규모에 달했다. 조직성격도 민족주의.무정부주의.사회주의 각 계열 운동자를 두루 포용하는 자유연합 결사처럼 되어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잭세의 확대는 예기치 못한 부작용도 낳았다. 늘어난 단원들 간에 이념노선과 활동방략에 관한 견해차가 나타나 보이기 시작하고, 급기야 노선분기와 조직균열 현상이 초래되기도 한 것이다. 1923년 여름에 고려공산당 산하의 실행조직인 적기단과의 합작 문제를 놓고서 노출된 의견대립도 그 한 사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