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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암(李鍾岩, 1896~1930) 본명은 이종순(李鍾淳)이고, 양건호(梁建浩) 등의 가명도 만들어 썼다. 1896년 음력 1월 12일, 대구부 대구군 해북촌면 백안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공산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고, 대구농림학교와 부산상업학교를 다니다 그만두었다. 그 후 대구은행에 취직하여 출납계 주임으로 있던 1917년 12월, 뜻한 바대로 예금액 1만 5백여 원을 빼돌려 갖고 잠적한 후 중국으로 탈출하여 만주 봉천에서 구영필을 만나 독립운동 자금으로 7천원을 맡겼다. 1918년 4월 봉천성 통화현 합니하로 가서 신흥중학교에 편입학했고, 1919년 5월 길림성 유하현 고산자에 신설된 무관학교로 옮겨갔다. 거기서 만난 김원봉의 권유에 응해 졸업 직후 길림으로 가서 조선독립군정사에 합류해 있다가 11월 10일 의열단 창립에 동참하였다. 의열단의 제1차 국내 항일거사를 위해 휴대금 잔액 3천원을 내홍아, 단장 김원봉 등이 상해로 가서 무기류를 구입하여 국내로 밀송 반입시키게끔 도왔다. 1920년 3월부터 단원들이 밀입국하여 거사계획 구체화와 실행이 추진되었으나 결행이 계속 지연됨에, 상해에 남아있던 그는 상황파악의 명을 받고 7월에 밀입국하였다. 6월 하순 이래로 단원 대부분이 경찰에 붙잡혀가고 있음을 알고는 자기가 직접 결행코자 했으나, 폭탄 보관책임자가 넘겨주기를 거부하여 실패하였다. 그렇게 된 내막에는 의열단 관계자 누군가의 밀고와 사주가 있었던 것인데, 당시에는 누구도 그런 줄을 몰랐다. 그 후 김상윤과 함께 밀양에 은신해 있으면서 소개받아 만난 최수봉에게 고인덕의 조력으로 제조된 폭탄 2개를 제공하여, 1920년 12월 27일의 밀양경찰서 투탄의거를 성사시켰다. 그 후로도 1년 동안 잠행하다 마침내 중국으로 탈출하여 단 본부에 합류하였다. 1922년 3월 28일, 일제 군부 거물인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대장을 암살코자 의열단이 감행한 상해 황포탄 의거 때 오성륜.김익상 다음의 제3선 저격수로 나섰는데, 총탄이 빗나가고 폭탄은 불발하여 목적달성에 실패했다. 1923년 이후로 의열다느이 대규모 암살.파괴 거사계획이 거듭 추진되었으나 번번이 실패하니, 1925년 7월 폭탄 2개를 휴대하고 단신 밀입국하였다. 1만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폭탄을 더 구입하고 일본 도쿄로 가서 투찬거사를 벌이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입국 전부터 동정이 밀보되어 경찰의 추적을 받던 나머지, 1925년 11월 5일 대구 외곽의 은신처를 급습 당해 체포되고 말았다. ('경북 의열단사건'). 1926년 1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로 이송되어 옥고를 겪었다. 위장병.폐병.인후염 증세가 매우 악화되니 1930년 5월 가출옥 석방되었으나, 열흘 만인 5월 29일 세상을 뜨고 말았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