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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후에 역신 배의 작간으로 국사가 날로 그릇되고 세상이 어지럽더니 급기야 경술국치를 당하매 통분이 날로 심하여 1913년 가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을 돌아오니 그때의 아픔과 원통함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서당을 세워서 어린이와 청년들을 교육하야 장래의 묘맥을 배양하고 혹은 산수를 찾아 소요하며 혹은 친구를 맞어 술잔을나누면서 스스로 나라잃은 슬픔을 달래고 매양 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경술년 욕됨은 우리나라 천고에 없는 치욕이지만 반드시 회홍할 날이 올 것이라 하더니 기미운동이 시작되자 전 군민이 공을 영수로 추대하매 공은 42세의 열혈용기로 동지를 규함하여(맹의섭 김재형 이은식 박한기 등) 비밀히 서로 호응하여 공주 청주 천안 등 지역에 독립선언문과 항일격문을 밤으로 살포하고 봉화대를 지정하야 서로간의 연락을 도모하고 삼월 삼십일 조치원 장날을 기하야 공의 신봉지휘로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여 대거시위하니 수천군중이 좌호우웅하야 만세를 제창하니 그 소리천지를 진동하게 되매 왜헌병이 말을 달려 혈안이 되어 제지했지만공은 그자들이 휘두르는 칼을 무릅쓰고 대적하니 적은 끝내 위협 총을 발포함에 이르자 적에 사로 잡힌 자가 백여명이었다. 고문으로 문책을 당하자 두 번 다시 않겠다고 서약한자는 그 자리에서 모두 석방하였으나 오직 공은 태연자약 말하기를 나는 나라를 잃었고 너희들은 우리나라를 강도질한 것이니 도적노을 잡고 잃은 것을 찾자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여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욕설하니 끝내는 공주감옥으로 피수된지라 마침 지산 김복한 선생과 같이 한방에 있게 되어 간담을 서로 비치고 울분을 서로 위로하며 때로는 충의를 강마하면서 이년의 옥고를 치루고 집에 돌아오니 옛집은 거의 쓰러지게 되고 빈부억에는 먹을 것도 없었다. 다행히 친구와 종친의 부조로 다시 서당을 짖고 옛날과 같이 문도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하였으나 왜경의 감시가 날이 갈수록 심한지라 마음은 항상 우울하고 원동하기만 한데 왕년의 혹형받은 것이 이미 고질화되여 1935년 을해 오월 십사일 운명하니 향년이 58세였다. 신대리 화동종산 간좌언덕에 안장하다. 부인은 공이 가신 후 십오년 경인 십일월 오일에 졸하셔서 공의 묘 왼편에 합장하다. 이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재환이요 자차는재서인데 백부에 출계하고 손자 종억 종백은 재환 소생이요. 종성 종진 종원 종길은 재서 소생이다. 아 공은 자질이 강정하고 호상하야 시골에서는 의열군자가 되고 조정에서는 염직한 신하였으니 수복지보가 있어야 할것인데 명도가 어겨짐이 많아서 조실 부모하고 온갖 고생을 격고 수도 길지 못하고 나라의 포상도 없으니 이 어찌 착한 자에 복이 온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공의 높고 높은 의로운 소리와 혁혁한 슬기로운 자행은 천년을 가도 무궁할 것이다. 공이 가신후 44년 을유년에 하늘은 결국 이 겨레를 돌보사 왜놈들은쥐구멍을 찾아 도망가고 국토는 광복되여 삼천만 동포가 다함께 자유를 즐기는데 지금 공을 황천밑에서 불러 일으켜서 오늘의 영광을 같이 못보는 것을 우리들은 통한하는 바이며 더구나 그 의열과 고절을 돌에 새기지 못하고 일주감을 지낸것이 죄송하기 한이 없었던 자에 정석모 도지사와 양후석 본군군수와 이창복 본면 면장께서 공익 충효의열이 뛰어남을 알게 되자 유구한 세월에서 유덕이 민멸될 것을 민망히 생각하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