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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공같은 義烈은 능히 악한 자도 청염케 할 수 있고 게으른 자도 수립케 할 수 있을 것인데 탕진한 나머지 자손도 힘이 없고 士林도 방관하여 于今 수십년이 지나도록 아직껏 포양의 典이 없더니 어느 날 나의 옛 친구 前典校였던 張佐鎭甫가 공의 行狀 및 手記와 3백여명 竪碑同意書를 갖이고 成均館을 찾아와 말하기를 이 일이 비록 늦었으나 生等이 鄕列에 살면서 의리를 묵과할 수 없은즉 관장의 紀文을 원하노라 하니 내가 그 때 사실을 참아 말할 수 없더니 오늘날 請文에 있어 한편으로는 공의 울분한 義烈을 찬동하고 한편으로는 典校의 闡美하는 성의에 감동하며 또한 우리 선조께서 토적하신 고충을 생각하니 여러모로 헤어리건대 결국 不文으로 사양할 수 없어 이에 行狀에 의해 서술하고 계속해 銘을 지으니 銘하여 가로되 장하다 김공은 청풍의 이름난 家閥이다. 지키는 결심이 굳고 정확하니 그 충절이 꺾이지 않았다. 국변이 망극하니 의혈이 창자에 가득찼다. 원수를 갚으려는 일념에 가정의 군색을 돌아보지 않았다. 구차한 목숨이 붙어 있다면 적의 멸망을 맹세코 보리라 성패와 利害는 힘으로 결단할 수 없다 내가 이에다 銘을 지어 후인의 반렬에 밝게 보이노니 웅장한 비석에 行人도 반드시 공경할 것이다. 대한 광복후 57년 신사 동지달에 전 독립기념관장이고 현 성균관장인 月城 崔昌圭는 지음 비문 및 안내문은 지사의 손자이신 청주외고 교사 김조영 선생이 보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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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26, 24세 되도록 출생계를 아니하고 新學校에 보내지 않고 창씨개명을 거부하며 왜놈의 상품은 절대로 쓰지 않고 자손에게 衣髮을 보존케 명하였다. 이 때문에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갖은 탄압을 받아오던 중 어느 날 강제로 체포되어 늑삭을 당하니 낙담하며 이 치욕을 받아가며 구차이 살면 무엇하리요하고 문을 걸고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코저 하거늘 家人과 친우들이 간곡히 만류하며 이 臥薪嘗膽의 때를 당하여 죽으면 여운이 없는 일 어찌 이토록 하는가 하니 한참만에 길게 한숨을 쉬며 탄식 曰 그러면 구차한 목숨이 있는 날까지 맹세코 왜적의 멸망을 보리라하더니 그럭저럭 해가 지나 乙酉光復을 맞이하였으나 남북이 분단되여 만족치 못하였다. 이로부터 前日 항적한 사실은 일체 입을 열지 않고 手筆로 韓日江華議約과 馬關條約 列國辨明書 및 皇后를 弑害한 일이며 擧義抗日 韓日合倂 保護條約 强制締結 勉菴崔先生의 討罪文 등 여러가지 문자를 일일히 기재하고 남은 여생을 억울하게 지내다가 戊戌 11월 13일에 天壽를 마치니 享年이 72세였다. 遠近의 조문객이 통곡하며 눈물 흘리지 않는 이 없었다. 配는 德水李氏와 延安金氏니 墓는 新安後麓에 3位 合窆하다. 2子를 두었으니 鎭武와 鎭守요 孫男에 용영 세영 명영 경영과 녀에 이은석 홍정일 박의신 손영주는 장방출이요 창영 조영 재영과 녀에 유기두 곽영신 전만수 유인화는 차방출이며 冑曾孫은 상민이요 다음은 不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