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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소리] 2019/3/1기사에 의하면 최창규 전 독립기념관장이 발문을 써서 2002년 연기군 유림들이 김유열 열사 의열비를 조치원읍 신안리에 건립 했고 "조치원 횃불만세 당시 머리 함몰 후 기적같이 살아나"라는 기사에서 항일 생활화했던 조부 김규열 기록 남아있지 않아, "정년 후 본격적으로 행적 찾아 나설 예정"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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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비 앞의 안내판에 쓰인 글. 김규열(金奎悅) 1887년 9월 5일 생. 1958년 음11월 13일 졸. 선생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니 기골이 장대하고 의협심이 강하였으며 효성이 극진하였다. 일본이 나라를 강점하자 신안, 서창, 침산, 봉산리 주민을 규합하여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부르다 왜경에게 맞아 생사가 경각이라 내버려져 겨우 목숨을 보전하였으며 전답 10,000여평되는 전재산을 매각하여 군자금을 조달하였고 미나미 총독을 조치원역에서 살해하려다가 경비가 삼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창씨 개명과 자손들을 호적에 입적을 거부하며 아무리 궁핍해도 왜적 상품을 일체 사용치 않으니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강제로 끌려가 상투를 잘리우고 흰 옷에 먹물을 칠하는 수모를 당하였으나 굽히지 않고 오로지 항일운동으로 일생을 마치었다. 이에 선생의 구국업적을 충남북 300여 유림이 칭송하여 의열비를 세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