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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항지서 전투와 망루 1948년 10월 여수순천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 남로당계열 장교들이 주동한 여순반란사건이 진압된 후 국군에 쫓긴 좌익인사들이 지리산, 덕유산, 삼도봉 등 백두대간 일대로 잠입해 6.25 전쟁 직전까지 빨치산으로 활동하며 군경과 대치를 이어갔다. 부항면은 산악이 험주난 백두대간 삼도봉에 인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로 연결되는 요충지인 관계로 빨치산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1948년 12월 이후 부항면 일대에 빨치산이 수시로 출몰해 관공서를 습격하고 마을 주민들의 생계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에 부항면민들은 부항지서를 빨치산에 대항하는 지휘소로써 진지를 구축하기로 결의하고 지역 유지와 주민들로부터 찬조금을 받아 자재를 구입하고 부역을 자청했다. 부항지서 경찰관과 주민들은 지례면의 토건업자 박만성과 함께 1949년 4월부터 5월까지 2개월에 걸쳐 콘크리트 망루와 지서에서 망루를 연결하는 터널을 구축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후 인천상륙작전으로 도주로가 차단된 북한군들이 기존 백두대간에서 활동하던 빨치산과 합류해 규모 1천 여 명에 이르러 '불꽃사단'이라 칭하며 부족한 식량과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수시로 부항면 일대 마을을 습격하고 부항지서를 공격했다. 당시 부항지서에 배치된 경찰 10여명으로는 대규모의 북한군과는 대적이 어려운 지경이었고 전시중이라 지원 병력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부항면의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의 지역청년들이 의용경찰과 대한청년단부항단원 이라는 이름으로 자원, 참전했다. 적의 침입에 대비해 의용경찰과 청년단원들은 각 마을별로 할당량을 배정해 나무를 조달하고 망루를 보호하기 위한 진지를 구축하며 전의를 다졌다. 1951년 10월 4일 오후 2시부터 5일 아침까지 적 병력 1천명이 막강한 화력으로 부항지서를 공격했다. 소총에 의지한 경찰관과 의용경찰, 청년단원들은 망루로 투척된 적의 수류탄을 다시 던져내는 악전고투를 펼친 끝에 부항 망루를 지켜내는 우리 전쟁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또 10월 23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2차 공격이 이어졌는데 적들은 외부 지원 병력 차단을 위해 전화선을 절단하고 무풍지서를 습격해 노획한 박격포를 쏘아대며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었으나 경찰관과 의용경찰, 청년단원들은 혼연일체가 되어 적의 끈질긴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저력을 발휘했다. 양 전투에서 적의 공격은 물리쳤으나 안타깝게도 순경 김영수와 의용경찰 이천만, 이강필, 이말기 4인이 전사하고 최유철, 김종렬 등 다수가 총상을 입었다. 적의 부항지서 습격을 물리친 이후에도 의용경찰과 청년단원들은 군경과 함께 수색작전에 참여해 삼도봉 일대의 적을 소탕하며 공을 세웠다. 또한 부항지서 전투에 참여했던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후 다시 군에 입대해 진정한 애국의 길을 몸소 실천했다. 주민과 경찰이 힘을 합쳐 자발적으로 지역을 수호하고 목숨을 바쳐 지켜낸 부항지서 망루와 부항지서 전투는 호국(護國)의 성지이자 애국의 밑거름으로 길이 빛날 것이다. 2019년 6월 25일 김천재향경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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