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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주자 학생들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시위대열의 선두에 나섰다. 군중은 7~800명을 헤아렸는데 일본인 마을을 지나 원산경찰서로 향하였다. 도중에 일제 경찰·헌병·소방대 등이 합세하여 소방 호스로 물감[色水]를 뿌리며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군중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어 전진하였다. 당황한 일제군경이 공포를 쏘자 군중 일부가 흩어지고 나머지는 역전으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다가 저녁 6시경 해산하였다. 이 날 원산 시내의 만세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약 2,000명이었으며, 50명이 체포되었다. 그 후 원산에서는 한동안 만세시위가 잠잠하다가 4월 5일 모든 상가가 철시하여 무언의 항의를 하였다. 주동 인물은 김진수(金鎭洙)였는데, 그는 같은 마을에 사는 황종성(黃鍾聲)을 찾아가서 일제에 대한 항의로 시내의 모든 한인 점포가 철시할 것을 합의하고 상가에 격문을 써 붙였다. 격문이 나붙자 시장은 일제히 문을 닫았다. 7) 충청남도 충남 지역의 3·1운동은 3월 3일 예산에서 처음으로 일어났다. 예산군 예산리에 있는 윤칠영 등 5명이 모여 서울의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날 밤 11시 30분경에 부근 동산에 올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충남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어 111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시기별로 보면 3월에 28회, 4월에 43회의 시위가 있었고, 4월 1일부터 8일까지 40회가 발생하였다. 그 과정에서 39명이 사망하고, 154명이 부상당하였으며, 681명이 체포되었다. 142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충청남도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공주의 김현경(金賢敬), 천안의 민옥금(閔玉錦)·유관순(柳寬順)· 한이순(韓二順)·황금순(黃金順)이다. 142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6(3·1운동 6), 1993, 536쪽 ; 김진봉, 「호서지방 3·1운동의 성격」, 『한국독립운동 사연구』 1, 1987 ; 김진봉, 『3·1운동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0 ; 김진호, 「공주지역의 3·1운동」, 『공주의 역사와 문화』, 공주 대학교 박물관, 1995 ; 김진호, 「대전지역의 3·1운동」, 『대전문화』 8, 대전광역시사편찬위원회, 1999 ; 정래수, 「충남지역 항일 학생운동 연구(1910-1930년대)」, 충남대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