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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해제 17(함남 14, 함북 3), 종교사립학교 12(함남 9, 함북 3) 개교가 참여하였다. 전국 일반사립학교 참가 수의 45.9%이다. 3·1운동에 참가한 교원은 전국적으로 164명인데, 함경도에서는 31(함남 20, 함북 11)명으로 전국 교원 참가자의 18.9%였다. 140 (1) 원산(元山) 원산의 3·1운동은 141 원산 남촌동(南村洞) 남감리교회 목사 정춘수(鄭春洙)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는 1919년 1월에 서울에 갔다가 신석구(申錫九)·오화영(吳華英) 등과 만나서 독립운동에 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2월 20일경 서울 영신(永信)학교 사무실에서 박희도·오화영·이승훈과 만나 계획을 실천하기 위한 구체적 의견을 나누었다. 거사 일정은 다른 동지들과 의논하여 확정되는 대로 오화영이 통지해 주기로 하고 정춘수는 원산으로 돌아왔다. 2월 23일 정춘수에게 서울의 박희도·오화영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거사일은 3월 1일, 거사의 주동은 개신교·불교·천도교 등 종교단체가 함께 맡기로 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정춘수는 같은 교회 전도사 곽명리(郭明里)를 서울로 보내 사실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였다. 2월 27일 서울로 출발한 곽명리에게서는 28일 아침까지도 연락이 없었다. 장로 차준승(車準繩)을 서울로 보내 서울의 상황을 알리도록 하였다. 한편 곽명리는 오화영을 만나 「독립선언서」 300매를 받았고, 3월 1일 오후 2시경 만세시위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은 후 28일 오후 원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날 밤 차준승으로부터도 전보가 도착하였다. 곽명리로부터 직접 전후 상황을 들은 정춘수는 밤중에 김계술(金啓述)·김기헌( 金基憲)·김장석(金章錫)·이가순·이순영(李順榮)·이진구(李鎭九)·인이극(印利極)·차광 은·차용운(車用運)·정연수(鄭延壽)·함태영(咸泰塋) 등 14명을 진성여학교에 회합시키고, 다음 날인 3월 1일에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고 밤을 세워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3월 1일은 원산의 장날이었다. 오후 2시 각 교회에서 종이 울리자 13명의 주동 인물들이 약속한 장소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며 장촌동(場村洞) 시장으로 행진하였다. 이 때 오경달[고물상]이 자기 집에 있던 북과 나팔을 학생들에게 나누어 14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9, 661~667쪽. 14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669~67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