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page

13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통해서 이민들에게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방화한다는 통지를 보냈다. 이들은 다시 마장면(馬場面)·인목면(寅目面)의 면민에게도 통지하여 3개 면이 합동으로 석교리(石橋里) 헌병파견소를 습격하려는 계획을 하였다. 4월 8일 오후 1시경 약 700명의 독검리 주민들과 인근 지역 주민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내문면 면사무소로 모여들었다. 이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에 돌입하자 철원분견소와 안협파견소 헌병이 출동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철원에서 활동하였던 곽진근은 1915년 서울성서학원을 졸업하고 그 해부터 철원교회의 전도부인으로 137 철원읍 관전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만57세의 나이로 1919년 3월 10일 철원읍내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더불어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군중이 군청으로 가서 기물을 파괴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일 때 친일파 박의병의 집에 가서 “이완용이 분명 이 집에 숨어 있으니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그 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과 시위를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11일에도 철원역 부근에서 시위에 참여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는 등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6월을 언도받고 공소하여 11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4월에 벌금 10원으로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38 3·1운동 직후 철원에 거주하게 된 한 선교사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우리들은 독립운동이 있은 후 즉시 철원에 왔는데, 많은 구역장들과 전도부인들과 기타 교인들이 체포도 되고 혹은 은신도 하여 사람들이 마치 목자 잃은 양과 같이 전부 흩어졌습니다.” 139 6) 함경도 함경남도의 3·1운동은 주로 천도교 지도자에 의하여, 함경북도의 3·1운동은 천도교·개신교 지도자에 의하여 인도되었다. 3·1운동에 참여한 학교는 전국적으로 98개교인데 함경도에서는 관립학교 1(함남 1), 공립학교 12(함남 7, 함북 5), 일반사립학교 137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여성사연구회 엮음, 『한국교회 전도부인 자료집』,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 145쪽. 138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11.10.) ; 『독립신문』1919.10.14, 「철원독립군의 판결」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9, 1979, 244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916~921쪽. 139 윤정란, 「강원지역 기독교 여성교육사업과 31운동」, 『여성과 역사』 10, 한국여성사학회, 2009, 8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