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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송의선(宋義宣)이 학생들과 별도로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오후 3시경 학생들이 먼저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성인들이 이끄는 시위대는 오후 4시경에 합류하였다. 두 계통을 통해 군중이 북간산 아래 철원군청에 모였을 때 약 500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며 군청으로부터 헌병분견소까지의 길이 군중으로 메워졌다. 성인 시위대는 이배근·이학수의 주도하에 군청 안으로 들어가 군청 안에 걸린 일본기를 뽑고 미리 준비한 커다란 태극기를 단 후 만세를 불렀다. 군청 안팎에서 학생과 일반인이 하나가 되었다. 군청에서는 군수 등 군 직원들 모두가 도망쳤고, 그 날 숙직이던 서기 김규환(金圭煥)과 최인옥(崔麟玉)만 남아 있었다. 엄재형·이배근·이학수가 독립운동에 대한 연설을 하였다. 군중은 다시 만세시위에 들어가 헌병분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불렀고 태극기를 앞세우며 군수 오태환(吳台煥)의 집으로 몰려갔다. 군중은 군수를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고 구타하였다. 군수가 군중에게서 도망쳐 민가에 숨자 만세시위대는 군수가 숨은 윤태항(尹泰恒)의 집을 포위하고 군수를 끌어냈다. 군수는 끌려나와 군청에 와서 굽신거리며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시위대는 월하리의 친일파 박의병(朴義秉)의 집으로 몰려갔고, 송의선은 박의병을 죽이자고 외쳤다. 박의병은 구한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친일파로 이완용(李完用)과 가까운 사이였다. 시위대는 그를 위협하여 숨겨놓은 이완용을 내놓도록 하자고 외쳤다. 시위대가 집에 들이닥쳤을 때 박의병은 헌병분견소의 군조(軍曹)와 같이 있었다. 군중은 이튿날 다시 모이기로 하고 헤어졌다. 3월 11일 아침 시위군중은 서문거리에 모여 철원역으로 갔다. 철원역은 읍에서 4킬로 떨어져 있었는데 역에 모인 군중은 일제측 기록에 700명이었다고 한다. 군중은 마침 역에 정차하여 있는 기차를 향해 만세를 불렀고, 기차에 탔던 사람도 손을 흔들며 만세군중을 격려하였다. 이 날 기차에는 호수돈여학교 학생 조화벽(趙和璧)이 타고 있었는데, 그녀는 울면서 손을 흔들었다고 증언하였다. 시위군중은 철원역에서 다시 읍내로 들어와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다. 전날의 주동 인물이 앞에 섰는데, 농업학교와 보통학교의 학생 중에 역으로 못 왔던 학생들이 합세하였다. 보통학교 학생이라고 해도 20세 전후의 청년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많아진 군중이 읍내로 들어가니 처음에는 자전거를 탄 헌병 5명이 나와 길을 막았다. 그러나 시위군중의 행진을 막을 수 없자 기마 헌병이 나왔다. 그래도 군중을 해산시키지 못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