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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해냈다. 125 기숙사 2층에 기거하고 있던 일본인 교사 호시코[星子]의 눈을 피하기 위해 미술교사 구순 선(具順善)의 방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애국가 가사를 등사하였다. 200여 개의 태극기를 3일 동안 만들었다. 2명씩 조를 짜서 흰 치마폭 속에 태극기 묶음을 감추고 숭덕학교 지하실까지 옮겼고, 길선주 목사 등이 태극기를 인수하였다. 또 다른 이들은 박현숙의 지도를 받아 3일 동안 밤을 새워 태극기를 만들어 대찰리(大察里)에 있는 교우 이성실의 집 장롱 속에 감추었 다. 이렇게 준비한 태극기는 빨래 광주리와 물지게에 넣어 운반하였다. 그리하여 숭덕학교에 서와 같은 시간, 같은 방법으로 거사하기로 약속한 남산현교회까지 무사히 옮길 수 있었다. 126 박현숙은 3월 1일과 2일의 만세시위에는 앞장서지 않고 3월 3일 남산현교회에서 본격적인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하였다. 3월 3일 남산현교회에서 유력한 어느 가정의 결혼식이 있다는 내용의 안내장을 평양 주민들에게 보냈다. 결혼식을 구실로 만든 주민 집회에서 독립선언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계획 때문에 박현숙은 은밀히 행동했고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3월 1일 박현숙은 남산현교회의 독립선언이 있은 후 사람들 속에 끼어 거리로 나갔다. 교우 오인 근(吳仁根) 집에서 할머니 옷으로 변장하고 시위군중 속에서 동정을 살피며 시위대열을 지 휘하였다. 2일에는 만수대에서 만세운동과 시가행진이 있었는데 역시 변장하고 참여하였다. 이렇게 이틀간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집으로 돌아온 박현숙을 형사 2명이 찾아와 남대문경찰 서로 연행되었다. 그 곳에는 신홍식 목사 집에서 함께 계획을 세웠던 동지들이 먼저 잡혀와 악명높던 고등계 형사 나까무라에게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나까무라의 첫 질문은 “혈성가를 누가 지었느냐”는 것이었다. 박현숙은 대답 대신 혈성가 를 1절부터 4절까지 심한 구타와 욕설 속에서도 불렀다. 나까무라는 거사계획, 활동상황 등 을 하나하나 캐물었고, 그녀는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여러 달 전부터 지하활동을 한 125 「身分帳指紋照會回報書」 ;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 독립문화사, 1970, 152쪽 ; 金正明, 앞의 책, 1967, 462쪽 ; 문일민, 『한국 독립운동사』, 사단법인 애국동지회, 1956, 166쪽 ; 『독립운동사』2, 1979, 366쪽 ; 『독립운동사』 8, 1979, 331·338·346·384 쪽 ; 『독립운동사』 10, 1979, 863쪽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4,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84, 409·414·416·434·437·448·961쪽 ; 박찬일, 『심은대로 : 청해 박현숙 선생의 걸어온 길』, 심은대로출판위원회, 1968, 58~85쪽 ; 3·1선도자찬하회, 『구원의 횃불』, 중앙여자중고등학교, 1971, 198~202쪽 ; 숭의90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93, 120쪽. 126 숭의90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93, 124~12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