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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해제 개신교회 경영 학교 교원은 대부분 검거되었고 개신교신자들과 천도교신자들은 행동을 감시당하였다. 그러나 평양시내에서는 3월 2일부터 9일까지 매일 시위가 벌어졌다. 3월 2일 오후 1시부터 평양경찰은 대거 출동하여 검거에 나섰다. 3월 1일부터 8일까지 평양 시내에서 4백여 명이 검거당하였는데 그 중 일부는 경찰에서 고문당한 후 구류 또는 석방되고 나머지는 즉결재판으로 태형(笞刑)을 받고 48명은 검찰에 넘어가 기소되었다. 기소된 사람은 학생 9명, 개신교신자 11명, 천도교신자 10명, 직공 3명, 학교 교원 9명, 기타 6명이었다. 평양에서의 만세시위는 3월 26일과 4월 1일 다시 일어났다. 3월 26일에는 극장에 있던 청년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자 일반이 이에 호응하면서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시가지로 나가서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일제경찰은 헌병대와 수비대·재향 군인·소방수·거류민들을 총출동시켜 철저히 경계하는 한편 친일경력이 있는 자의 가족과 관청에 있는 사람의 가족은 농촌지대로 피난시키는 등 비상사태에 대비하기도 하였다. 4월 1일 오후 2시경에는 신창리 시장에서 수백명이 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평양에서 활동하였던 박현숙은 숭의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3년 김경희(金敬熙)·황애덕(黃愛德) 등이 주도·조직한 비밀결사 송죽회(松竹會) 124 에 가입·활동하였다. 졸업 후 1915년 4월 전주 기전(紀全)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교내에 송죽회지부를 조직하고 제3대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과외수업으로 한국사를 가르치는 등 구국교육에도 진력하였다. 1919년 1월부터 남산현교회의 신홍식 목사 집에서 여러 차례 평양의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그러다가 신홍식 목사로부터 고종의 인산을 기해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있음을 알게 되어 태극기 제작과 애국가 등사 일을 맡았고 권기옥(權基玉)·김명덕(金明德)·김순복(金順福)·김옥석(金玉石)·박정인(朴貞仁)·배인 수(裵仁洙)·장성심(張聖心)·차진희(車診姬)·최순덕(崔順德)·한선부(韓善富) 등과 함께 124 송죽결사대의 초대 회장은 김경희 선생, 2대는 황애시덕 선생, 3대는 박현숙 선생이었다. 황애시덕은 원죽(源竹), 박현숙 선생 은 청해(靑海) 등의 암호명을 썼다.(숭의90년사편찬위원회, 『숭의 90년사 : 1903∼1993』, 숭의학원, 1993, 1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