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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해제 시위도 조직하였다. 2월 12일 기독교서원에서 준비회담을 한 후 안세환은 서울의 개신교측 수뇌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2월 20일에는 기독교서원에서 제2차 준비회담이 열렸고, 2월 24일에는 길선주 목사 집에서 제3차 준비회담을 개최하였는데 서울의 진행상황을 들었다. 2월 25일 숭현여학교에서 제4차 준비회담을 열고 3월 1일 시위에 관한 구체적 계획을 수립하였다. 26일 시내 각 교회에, 3월 1일 오후 1시부터 고종황제 봉도식을 장대현교회 옆 숭덕학교 교정에서 거행할 것이니 참석하라는 통지서를 발송하였다. 그리고 숭덕학교와 숭현학교 남녀학생들을 동원하여 두 학교 천정에서 극비리에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독립선언서」는 28일까지 서울에서 보내준다 하였으니 기다리기로 하였다. 27일 숭현학교에서 최종 회합을 열고 그동안의 준비 작업을 점검하였다. 3월 1일 정오 평양시내 각 교회 종각에서 종이 울리며 만세시위의 봉화가 올랐다. 장로교측에서는 서울에서 독립선포식을 거행한 시각과 동일한 오후 1시에 집회를 시작하였다.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고종황제 봉도식이라는 명목 아래 남녀 교인들과 유지들이 식장인 숭덕학교 교정으로 모였다. 장내는 1,000여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선교사 모펫(Moffet)도 내빈석에 와 앉았고 일본인 사복형사도 진을 치고 있었다. 봉도식은 찬송가와 기도로 간단히 조의를 표하며 끝났다. 그러자 갑자기 대형 태극기가 단상에 게양되었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고 독립운동에 관한 연설이 이어졌으며, 애국가도 불렀다. 숭덕학교 교사들이 준비했던 태극기를 나누어주었다. 일제경찰의 해산 요구에도 시위군중은 큰 거리로 행진을 시작하였다. 주민들의 호응으로 시위행렬은 점점 증가하였다. 군중에게는 선언서와 태극기가 공급되었다. 남녀 중학생이 각자 태극기 10개씩과 선언서 20장씩을 가지고 거리마다 서 있다가 시위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상인들도 철시하고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보통학교 학생들도 시위에 합류하였다. 시위 도중 설암리 천도교구장 집회에서 모인 군중과 합류하여 남문거리 평양경찰서 앞까지 이르렀다. 이 곳은 당시 신시가라 불리던 일본인 상가와 일본인들의 거주지 입구였다. 여기서 군중은 경찰서쪽을 향하여 혈성가(血誠歌) 123 를 부르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123 국가보훈처, 『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 25 (일본편 7 : 3·1운동 독립선언서와 부문), 2002, 89~91쪽에 한글 원문과 일본어 역문이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