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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1919년 6월 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3월의 형을 언도받고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10일 고등법원형사부에서 기각당하였다. 120 4) 평안남도 평안도 지역의 3·1운동은 3월 1일 평양·진남포(鎭南浦)·안주읍내(安州邑內)·선천 시내(宣川市內)·의주읍내(義州邑內)·중화군(中和君) 상원(祥原) 신읍(新邑)을 시작으로 4월 21일 개천읍내(价川邑內) 시위까지 거의 매일 평안도의 모든 지역에서 일어났다. 121 이 자료총서에 수록한, 평안남도에서 만세운동을 펼친 여성은 평양의 이효덕(李孝德)·박현숙( 朴賢淑)·채애요라(蔡愛堯羅)이다. (1) 평양(平壤) 평양의 3·1만세시위는 122 3월 1일 세 곳에서 시작되어 가두에서 합류하였다. 즉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 앞마당인 숭덕학교(崇德學校) 교정에서는 장로교신자들이, 광성학교(光成學校) 근처 감리교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뜰 안에서는 감리교신자들이, 시내 설암리(薛岩里) 구 대성학교(舊大成學校) 뒷자리인 천도교구당에서는 천도교신자들이 각각 독립선언식을 하고 시내로 진출하였다. 장로교측에서는 이승훈(李昇薰)이 서울·평양·선천 등지를 왕래하며 민족대표단 구성과 동지 규합에 진력하였다. 1919년 2월 14일부터는 1주일간 병을 핑계로 평양시내 기홀병원(紀笏病院)에 입원하면서 장로교 길선주(吉善宙) 목사, 감리교 신홍식(申洪植) 목사 등과 밀의를 계속하였다. 선천의 양전백(梁甸伯) 목사와 평양 기독교서원 총무 안세환(安世桓)에게 서울로 올라가 협력하도록 하였다. 또한 평양시위는 윤원삼(尹原三)과 도인권(都寅權)에게 책임을 맡기고, 진남포에 살고 있던 임치정(林蚩正)과 연락하여 그 곳 120 「판결문」(고등법원, 1919.7.10)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매일신보』 1923.3.29, 「이화교 졸업식, 졸업생 20명, 유창한 영어의 연설」 ; 『매일신보』 1927.11.24, 「해주녀청 혁신총회 간부도 신선」 ; 『동아일보』 1930.3.22, 「해주녀자토론 성황을 일워 : 문화를 발 전함에는 말이냐? 글이냐? 演士 金道善 金淑仁 李孝珠 曹忠成」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2, 761∼763쪽 ; 3·1여 성동지회, 『한국여성독립운동사』, 3·1여성동지회, 1980, 601∼604쪽.  12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503~505쪽 참조. 12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359~376쪽 ; 김정인·이정은, 앞의 책, 2009, 219~22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