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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해제 (3) 옹진군(甕津郡) 옹진군의 3·1운동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119 옹진군에는 해주를 경유하여 3월 1일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다. 박희도는 그의 처남인 김명신(金明信)에게 「독립선언서」 450장을 주어 옹진·해주 지역의 개신교회들에 전달하게 하였다. 김명신은 2월 28일 아침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서울을 떠나 그 날 오후 해주에 도착하여 「독립선언서」를 전하고, 3월 1일에는 옹진읍 마산 온천(馬山 溫泉)의 교회에 전달하였다. 이 날 교회에서는 신자들을 모아 「독립선언서」의 주지를 설명하며 나누어주었다. 「독립선언서」는 그 날 읍내와 흥미면(興嵋面) 등에 배포되었다. 3일 옹진읍 장날에 몇 명이 독립만세를 불렀는데, 전날 마산온천교회 사람들이 헌병대에 검속당하고 감시가 엄중하여 본격적인 시위를 준비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개신교측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좌절되자, 천도교 신자들이 다음 장날인 3월 8일에 시위를 일으켰다. 천도교 교구장 정한영(鄭漢泳)의 주도로 교정면(交井面)·동남면 (東南面)·부민면(富民面)·북면(北面)·용연면(龍淵面)·용천면(龍泉面)·흥미면 등의 대표들이 읍내에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8일 천도교신자들을 비롯한 군중 100여 명이 읍내 고천잡화점(古川雜貨店) 앞 네거리에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일제헌병대의 탄압으로 군중은 곧 해산되고 주동자들은 체포되었다. 천도교신자들은 3월 13일에도 시위를 전개하였다. 읍내 시위에 이어 만세운동은 옹진군의 각지로 퍼져나갔다. 4월 7일 가천면 장현리(茄川面 長峴里)에서 약 200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려다가 해산당하였다. 4월 13일에는 흥미면 안락리(安樂里)에서 60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14일에도 안락리에서 시위가 있었다. 15일에는 흥미면 식여리(食餘里)의 율목동(栗木洞)교회에서 500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16일에는 용천면 원산리(院山里)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옹진군에서 활동하였던 조충성은 해주 의정학교(懿貞 學校)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19년 3월 1일 마산면에서 이경호(李京鎬)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교부받아 소지하고 교회당에서의 고종황제 봉도식에 참석하였다가 체포되어 11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320~325 ; 김정인·이정은, 앞의 책, 2009, 211~2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