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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천도교당에 모여 1세 교주 최제우(崔濟愚)의 순도 기념식을 마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만세를 부르다가 해산 당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3명이 체포되었다. 이 날 이후 인근 각 마을에서는 밤이면 산마다 불을 놓고 만세를 부르는 봉화시위를 계속하였다. 개신교 신자들도 평양사리원 등과 연락하며 동요하였다. 3월 7일 토산을 중심으로 천도교신자들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서북면 원산리의 서당교사 등이 각 면과 리의 구장들에게 3월 7일에 시위하자는 격문을 보냈으나 불발에 그쳤다. 금천군의 만세시위는 4월에 시작되었다. 4월 1일 백마면 용성리(白馬面 龍城里)에서 8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로 달려가 시위하다가 해산하였다. 2일부터는 더 많은 시위가 일어났다. 오후 1시경에 백마면의 개신교신자들을 중심으로 80여 명이 현내면 송정리(縣內面 松亭里) 방면을 향해 만세를 부르며 행진하였다. 헌병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30여 명이 구속되었다. 합탄면 매후리(合灘面 梅後里) 부근에서는 오후 2시경 약 300명이 모여 독립만세라고 쓴 기를 앞세우고 독립선언의 취지와 경위를 설명하며 독립을 경축하는 의미로 만세를 불렀다. 시변리의 공립보통학교 학생들도 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 날 고동면 구성리에서도 2회에 걸쳐 만세시위가 있었다. 4월 3일 오후 2시경에 현내면 송정리에 30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다가 헌병주재소에 구속된 사람들 탈출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체포된 사람들이 금천읍 헌병분견대로 이송된 후였기에 해산하였다. 이 날 오후 1시경 금천읍 부근에서 약 80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오후 7시경에는 약 200명의 만세시위대가 읍내로 몰려들었는데 일제헌병의 무력 제지로 해산되었다. 같은 날 새벽에 구이면의 관문리·문성리 주민 300여 명이 만세를 부른 후 잠시 흩어졌다가 아침 9시경에 다시 모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시도하였다. 헌병들이 저지하자 흥분한 군중들이 돌을 던져 저항하였고, 헌병의 발포로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다쳤다. 오후 5시경에는 같은 면의 미당리에서도 10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숙인면 행정리(宿仁面 杏亭里)에서도 약 300명이 만세시위를 하였고, 경의선(京義線) 계정역(鷄井驛) 부근에서는 약 600명이 만세를 불렀다. 4월 4일 고동면에서는 병점 장날을 기하여 면민이 모두 참가하는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는데 헌병대가 미리 탐지하여 시장 골목을 지키고 통행을 금지하여 실패하였다. 오후 3시경에 300여 명의 면민들이 시장 입구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해산하였다. 금천군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