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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3월 27일 청석면 심학산에 약 300명의 군중이 흰 옷을 입고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불렀고, 정오를 지나 산에서 내려와 오후 2시경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며 면장의 참여를 요구하였다. 일부 시위대는 면사무소 판자문과 기와 일부를 부수었다. 시위대는 교하주재소로 향하였는데, 출동한 주재소 헌병들이 발포하자 해산하고, 밤이 되자 다시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이 날 교하공립보통학교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던 임명애·염규호 부부, 학생 김수덕, 농민 김선명·김창실이 만세시위 집결을 알리는 격문을 등사하여 돌린 후 700여 명의 동·리·민을 모아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이들은 면서기들에게 업무 중단을 요구하며 유리창을 부수었다. 시위대는 1,500여 명으로 증가하였고, 교하헌병주재소로 행진하였다. 교하주재소 헌병들은 파주헌병분소에서 병력을 지원 받아 시위대를 향하여 발포하였다. 당하리 최홍주(崔鴻柱)가 사망하자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이 날 광탄면에서도 발량리 주민들을 중심으로 수백 명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신산리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3월 28일 광탄면 신산리에서 권중환(權重煥)·김웅권(金雄權)·심상각·심의봉(沈宜鳳) 등 19명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들은 광탄면에 본부를 두고 고양군민 일부까지 참여시키는 군중동원계획과 시위계획을 세워 2,000여 명의 군중을 집결시켰다. 이들은 신산리의 광탄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여 조리면 봉일천 시장으로 행진하여 봉일천 장에 모인 1,000여 명과 합세하여 3,000여 명의 군중을 이루었다. 시위대는 조리면사무소 건물과 집기 일부를 파손하고 면장과 면서기를 붙들어 봉일천 시장까지 앞장세웠으며, 봉일천 헌병주재소도 공격하였다. 헌병들이 시위대에 발포하여 광탄면의 박원선 등 6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3월 30일 광탄면의 봉일천 시장에서 일본헌병대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많은 주민들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3,000명에 이르렀다. 시위대는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여 구금 인사 한 명을 일시 탈환하였다. 이 날 천현면 법원리에서는 만세시위에서 희생된 김남산의 장례를 치른 후 일제의 만행에 항의하는 추모 만세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법원리에서 문산 방면으로 향하였는데 도중에 일제군경의 발포로 강복산(姜福山) 등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파주군에서 활동하였던 임명애는 1919년 3월 10일 파주군 와석면 교하리의 공립보통학교운동장에서 100여 명 학생을 지휘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