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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학하여 신학문을 접하였다. 그리고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몸을 아끼지 않겠다는 굳은 신념을 갖게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외딴섬에 살고 있는 무지한 사람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사명감 과 신념을 가지고 주로 외딴섬을 찾아 전도활동과 더불어 애국사상을 깨우쳤다. 101 1919년 2월 26일 어윤희는 개성읍 성경학원 기숙사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0매를 교부받아 읍내에 배부하도록 부탁받고 3월 1일 신관빈과 함께 읍내 거리에 배포 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언도 받았다. 개성의 만 세운동에 대해서는 두 개의 다른 서술이 있는데 거사일시와 함께 행동한 행동대원의 차이는 있지만 두 개의 서술 모두 어윤희를 개성지역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자로 인정하였고, 개성 의 만세운동 최전선에서 개성시민과 학생을 이끌었다고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동일하다. 하 나는, 경성에서 전해온 「독립선언서」를 수령한 강조원 목사가 호수돈여학교 졸업생이자 교회 유치원교사로 있던 권애라에게 이를 전했으며, 권애라는 호수돈여학교 상급생 최옥순을 통 해 어윤희에게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박희도의 밀명으로 서울에서 내려온 안 병숙이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을 포섭하고 서울에서 진행되는 독립선언식과 만세운동 계획을 알려주었고 이들 학생들은 어윤희를 찾아가 상의하여 어윤희를 중심으로 개성의 만세시위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어윤희는 3월 3일 오후 2시를 거사시간으로 잡고 교회청년들을 동원하여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고 호수돈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로 개성의 만세시위가 시작되었 다는 것이다. 102 권애라·신관빈·어윤희는 서대문감옥 8호 감방에 수감되었다. 당시 그 방에는 노백린(盧 伯麟) 장군의 딸 노순경, 유관순, 정신여학교 학생 이아수, 구세군신자 임명애 등이 투옥되 어 있었다. 103 8호 감방은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무장한 여성투사들이 수감되어 옥중투쟁의 본부라 칭할 정도였다. 104 어윤희는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기념 만세투쟁을 감행하였다. 통방이라는 감방 안에서 비밀통신방법을 통해 17개 여자감방 전체에 비밀리에 연락하였다. 1920년 3월 1일 101 3 ·1선도자찬하회, 『구원의 횃불』, 중앙여자중고등학교, 1971, 109~112쪽 : 박용옥, 「3·1운동에서의 여성 역할」, 『아시아문화』 15, 2000, 38쪽 102 박용옥, 『한국여성항일운동사』, 지식산업사, 1996, 70~74쪽.   103 이장낙, 『우리의 벗 스코필드』, 정음사, 1962, 95~96쪽 : 강영심, 「어윤희(1880-1961)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문화연구』 17, 2009, 274쪽. 104 김삼웅, 『서대문형무소 근현대사』, 나남출판, 2000, 113~122쪽 : 강영심, 앞의 논문, 17, 2009, 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