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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해제 신관빈은 남감리파 전도부인이었고 호수돈여학교의 사감으로 1919년 3월 1일 개성읍 만월정·동본정·북본정에서 어윤희와 함께 「독립선언서」 2,000매를 마을 주민 등에게 배포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99 그녀가 출옥 후 『동아일보』에는 ‘출옥자의 감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게재되었다. “별로 이렇다는 특별한 감상을 말할 것이 없습니다. 원래 작년 3월 이래로 수백명의 여자가 입옥하였으나 대개는 방면되고 지금은 소요범인으로 남은 사람은 십여인밖에 남지 못하였습니다. 옥중에서 지내는 생활은 의례히 그러할 줄 알았으니까 별로 놀랄 것도 없고 별로 고통을 느낄 것도 없었습니다. 저는 작년 3월 초순에 개성에서 선언서를 배부하고 그 이튿날 예배당에 갔다가 잡혀 옥중에 들어가 1개년 동안 복역하고 나왔습니다. 마루바닥 위에 다다미를 깔고 그 위에서 자는데 사람 4명 앞에 일본이불 하나씩을 주옵니다. 그러나 어떻게 추운지 몸이 모두 얼어서 죄다 터지고 아파 참아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중 더욱이 간수의 가혹한 폼은 무엇이라 말해야 옮을지 그도 사람인가 인정을 가진 동물인가 의심할 만큼 냉혹하옵니다. 물론 그 속에서 하고 지내는 폼이나 대우받는 것은 사람으로는 받지 못할 만큼 망측합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아무조록 교육을 많이 시켜 수용할 인재를 양성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제일 통절히 느낀 것은 우리의 사회에 인재의 결핍이올시다.(하략)” 어윤희 100 는 1877년 음력 6월 30일 충북 충주군 서태면 덕근리에서 어현중(魚玄仲)의 무남독 녀로 태어났다. 9살까지 아버지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2세에 어머니를 여의었고 16세에 결혼 하였으나 남편이 결혼 3일만에 동학 의병으로 나아가 싸우다가 전사하여 청상과부가 되었다. 17세에는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다. 그녀는 고향을 떠나 해주를 거쳐 개성에 안주 하였고, 1910년 32세 때 개성 북부교회 신자가 되어 새로운 인생을 출발하였다. 그는 교회생활 을 통하여 배움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갖게 되어 34세의 나이에 개성 미리흠여학교 기예과에 입 99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4.11) ; 「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 ; 『매일신보』 1919.4.18, 「평강과 개성의 소요범공판」 ; 『동아일보』 1920.4.18, 「출옥자의 감상(一) 신관빈 여사의 말」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2, 515∼516쪽. 100 어윤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연구들이 있다. 장병욱, 『한국감리교여성사 : 1885-1945』, 성광문화사, 1979 ; 이순자, 「떠난 자 리가 아름다운 고아들의 어머니 어윤희」,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엮음, 『믿음 그리고 겨레사랑』, 2000 ; 박용옥, 「3·1운동에서 의 여성 역할」, 『아시아문화』 15, 2000 ; 최은희, 「어윤희」, 『여성을 넘어 아낙의 너울을 벗고 - 한국 최초의 여기자 추계 최은희 의 개화여성 열전-』, 문이재, 2003 ; 이덕주, 「독립운동과 유린보육원설립자 어윤희」, 『한국교회 처음 여성들-개화기 여성 리더 들의 혈전의 역사』, 홍성사, 2007, ; 강영심, 「어윤희(1880~1961)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문화연구』 17,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