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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주도한 허내삼( 許迺三 )은 “우리가 지금 만세시위를 벌이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우리의 행동을 저지하는 자가 있으면 각자 준비한 곤봉으로 막아야 한다”고 하며 방어용 도구 준비를 격려하였다. 만세시위대는 만월대를 지나 북본정 당교(堂橋) 앞에서 일제경찰과 충돌하였다. 만세시위대는 총칼로 위협하는 일제경찰에 맞서 돌을 던지며 대항하였고, 일제경찰과 격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총칼의 위협 앞에 주도자 17명이 체포·해산되었다. 95 4월 1일부터 6일까지 영북면 길수리(嶺北面 吉水里)에서도 여러 차례 만세시위가 있었고, 4월 6일 홍교면 사곡리에서는 개신교신자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일제경찰의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96 3·1운동을 사찰한 일제의 비밀기록은 개성의 3·1만세시위를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개성 예수교 부속 호수돈여학교 생도 35명은 3일 오후 2시경부터 삼삼오오를 이루어 찬미가며 독립가를 부르며 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개시함으로써 경찰서에 연행되어 설유를 받았다. 그러던 중 약 1천명의 군중이 몰려오므로 문전에서 막고 설유를 했지만 쉽게 응하지 않아 교장을 출두케 하여 설유케 한 바 생도들은 오늘의 거사는 깊이 각오한 바 있어 학교에 대하여는 이미 어제 퇴학계를 제출함으로써 학교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고로 교섭에 응치 않아 서장과 군수의 간곡한 설유에 의하여 점차 학교로 귀환케 함.” 97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개성에서는 권애라·신관빈·어윤희·심영식이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권애라는 1919년 3월 1일 개성군 송도면의 독립만세 운동시위에 주동자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1919년 5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아 공소하였으나 1919년 7월 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6개월 형이 확정되었다. 또한 1920년 7월 9일에는 서울시내 여러 교회에서 애국사상 고취를 위한 강연을 하여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고, 1922년 1월 러시아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極東人民代表會議)에 한국족(韓國族) 여성대표로 참석하였다. 98 9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192쪽. 96 이병헌, 『3·1운동비사』, 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868쪽. 97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Ⅰ, 東京 : 原書房, 1967, 32쪽. 98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5.30) ; 「판결문」(경성복심법원 1919.7.4) ; 『동아일보』 1920.4.25, 5.13, 5.17, 5.19, 5.25, 5.27 ; 독립운 동 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1979, 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