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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명이 교동 읍내에 모여 공자묘(孔子廟)와 면사무소, 옛 군아(郡衙) 터 앞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해산하였다. 26일에는 화개면민 15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27일에는 강화읍에서 2,00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는데, 부내면사무소를 습격하고 면서기를 폭행하는 등 시위 양상이 격렬해졌고 일제헌병의 발포로 한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29일에는 부내면 월곶리(月串里)에서 100여 명이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시위 열기는 4월로 접어들자 강화군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4월 1일 양도면의 길정리(吉亭里)에서 만세시위가 있었고, 송해면 양오리(陽五里)에서도 10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였다. 송해면 솔정리에서는 성공회의 중심인물인 고성근이 신자들과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면사무소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양사면 산이포(山伊浦)에서도 수백 명이 야간에 등불과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한 후 해산하였다. 4월 2일에는 송해면에서 200여 명이 봉류산(鳳流山)에 올라 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경찰주재소가 있던 양사면 철산리(鐵山里)에서도 개신교신자들과 주민 등 150여 명이 시위를 하였다. 4월 7일 삼산면 석모리에서 이안득(李安得)의 주도하에 십수명이 당산 산정에 올라 봉화를 피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8일에는 삼산면·선원면·양도면 등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양도면에서는 인산리(仁山里)를 비롯한 면내 수 개 지역에서 100여 명씩 집결하여 산 위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선원면에서도 냉정리 등에서 산상에서 횃불을 피우고 독립만세를 불렀으며, 삼산면 석포리에서도 성공회 교회당 뒷산에서 7~80명이 횃불을 피우며 만세시위하였다. 4월 9일 이후에도 13일까지 불은면·삼산면·양도면 등에서 수십명이 주로 야간에 소규모의 산발적인 시위를 하였다. 이상과 같은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던 강화에서 활동하였던 조인애(曺仁愛)는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강화읍에서 유봉진(劉鳳鎭) 목사가 주동한 만세운동에 참가하여 강화 장터에 모인 10,000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강화군청으로 가서 군수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고창토록 하였다. 그리고 일제경찰에게 연행되어 있던 유희철(劉熙哲)·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요구하며 독립만세를 계속하고 고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