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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해제 한때 해산하였다가 다시 시장에 모여 늦은 밤까지 만세를 고창한 후 자진 해산하였다. 강화 읍내 시위를 주도한 유봉진은 그 후 마니산에 숨었으나 일제경찰이 그의 부모를 핍박하자 온수리로 내려와 체포되었다. 「독립선언서」를 지참하고 귀향하여 만세시위를 촉발시킨 황도문은 시위 직후 강화를 탈출, 제물포를 거쳐 강원도 산골에서 3년간 숨어지냈다. 읍내시위로 인하여 유봉진 등 45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그 중 33명이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또는 태형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18일 읍내에서의 대규모 시위소식을 접한 일제는 인천수비대 경찰 10여 명과 서울 용산 주둔군 40명을 강화도로 급파하였다. 현지에 도착한 일제군경은 19일 오전 9시부터 각 촌락을 샅샅이 수색하며 시위 참가자 63명을 체포하였으며, 길상면 온수리(溫水里)의 천도교구실을 수색하고 구덕희(具德喜)를 연행하였다. 그러자 이 날 오후 6시 온수리 천도교구에 태극기를 달고 천도교신자 등 수백 명의 주민이 과잉 탄압에 항의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온수리는 유봉진의 거주지이고 읍내 시위 당시 다음 시위장소로 약속된 곳이었다. 일제군경은 시위가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시위대 해산을 조건으로 구덕희를 석방하였다. 한편 부내면 출신으로 매일신보기자로 있던 조구원(趙龜元), 고익진의 아들 고제몽(高濟夢)은 3월 20일 강화경찰서 경부 이해용(李海用)과 선박운송회사를 경영하던 유진식(兪鎭植)에게 시위운동 탄압을 경고하는 서한과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점포 폐쇄를 요구하는 서한을 각각 발송하였다. 보성고등보통학교 학생 오영섭(吳永燮)도 강화경찰서 순사부장에게 시위탄압을 경고하는 글을 보냈으며, 합일학교(合一學校) 교사 구연준(具然濬)을 비롯하여 김영희(金永禧)·김한영(金翰永)·조봉암(曺奉岩) 등은 3월 20일경 『자유민보』(自由民報) 등 십수 종의 문건을 만들어 강화주민에게 살포하였다. 강화읍내에서 시작된 시위는 일제군경의 강력한 탄압에도 교동도 방면으로 파급되었다. 교동도에서는 21일부터 여러 날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21일에는 화개면민 130여 명이 교동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고, 22일에도 화개면민 100여 명이 3시간 동안 일제경찰과 대치하며 시위하였다. 이로 인해 강화 본도에서 출동한 일본군에 의해 주민 35명이 체포되었다. 23일에는 시위가 교동도의 전역으로 확산되어 학생과 개신교신자 등 100여 명이 교동으로 몰려와 만세시위를 하였다. 24일에도 100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