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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해제 동료들을 규합하기 위해 하숙을 나와 기숙사로 들어갔다. 그녀는 1학년이던 1917년부터 박희도(朴熙道)의 지도로 비밀서클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강평국·고수선·김숙자·김 일조·노순열·유재봉·이남재·이덕순·이덕요·이양전·이은·이정의·최정숙 등 본과와 사범과·기예과 학생 20여 명이 회원이었다. 최은희는 1919년 2월 28일 박희도를 만나 「독립선언서」를 전달받고 “내일 오정에 전체 학생을 이끌고 탑골공원으로 나오너라” 하는 당부를 받았다. 그 날 저녁 제주 출신 남자유학생들이 비밀리에 기숙사로 찾아와 같은 고향인 소구선·최정숙을 만나고 갔다. 토요일인 3월 1일 수업은 긴장 속에서도 평상시와 같이 진행되었다. 그 날 새벽 「독립선언서」 뭉치가 학교 담 너머에 던져진 것을 발견한 학교당국은 심상치 않은 사태를 우려하여 긴급 교직원회를 열어 학생들을 하학시키지 않고 점심용 빵을 사러 보내는 등 부산하게 움직이고 교문을 폐쇄하였다. 학생들은 포기하지 않고 돌, 칼, 도끼 등을 찾아내어 교문을 부수고 혹은 기숙사 창문을 타고 나와 일단 덕수궁 쪽으로 향하였다. 경성여고보 학생들은 혼잡 속에서 몇 갈래로 헤쳐져 만세를 부르다가 32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전교생의 10%가 넘는 숫자였다. 3·1만세시위로 체포된 경성여고보 학생들은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는데 학교당국의 급한 조처로 단순가담자라고 판단된 학생들은 대부분 방면되고 10여 명이 구금되었다. 일제경찰의 조서에는 강평국·고수선·김일조·유재룡·이명숙·최은희·최정숙 등을 주동자로 지목하고 그밖에 김애숙·유경숙·이금자·이순이 등을 구금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본과·사범과·기예과 학생들이 고루 포함되어 있었고 종로경찰서 외에 다른 지역의 경찰서에 연행된 학생도 있는 것으로 후에 밝혀지기도 했다. 이때 퇴교 혹은 휴학 징벌을 받은 학생들은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 발표로 특별사면되었다. 80 간호사들도 만세운동에 합류하였다. 탁명숙(卓明淑)은 구세병원 간호사 81 였는데 1919년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붉은 깃발을 흔들며 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그 해 9월 보석 상태에서 사이토[齋藤實] 조선총독 처단을 시도했던 강우규(姜宇奎)를 서울 누하동(樓下洞) 80 경기여고동창회(경운회)개교100주년기념사업회 편찬위원회, 『경기여고 100년사』, 도서출판 경운회, 2008, 58~60쪽. 81 세브란스병원에서 3년 6개월동안 실습하고 1917년에 구세병원의 간호사가 되었다.(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17, 1994, 187쪽(번역문), 469쪽(원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