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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해제 남대문에서 학생들 주도의 제2차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1919년 11월 1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76 정신여학교에서는 이아수(李娥洙)가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녀는 1919년 3월 5일 서울 남대문역 앞에서 이화여학교 유점선 외 수십명과 함께 학생들의 제2차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을 언도받아 공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당하였다. 77 출옥한 후 『동아일보』에는 ‘출옥자의 감상’이라는 제목으로 이아수의 다음과 같은 글이 게재되었다. “나의 지난 바 감상은 너무도 뒤숭숭하여 대양에 홀홀히 움직이는 파도 모양으로 수란함으로 질서없는 말로 몇 말씀 여쭙겠습니다. 저는 그 쓸쓸하고 냉랭한 철창 속에서 지독한 괴로움을 당할 때에 설상가상으로 감기와 위병으로 더욱 괴로움을 당하였습니다. 짐승과 같은 대접을 받아가며 7,8개월 동안 예심인지 무엇인지 걸려있다가 13개월 되는 달에 몸에 붉은 옷을 걸게 될 때에 나는 다만 한 번 ㅁ 고 달게 받았습니다. 붉은 옷을 입힌 후에 죽 둘러앉히더니 ‘네가 소위 조선여자냐. 네까짓 것들이 건방지게 웬 정치에 상관을 하느냐. 아직 조선여자는 정치에 상관할 정도가 못된다. 너희는 지금 겨우 가정이나 개량하고 자녀나 잘 양육하여라’ 할 때에 조선여자 중 일 분자인 저는 가슴을 칼로 베는 듯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붉은 옷을 입은 후에 때를 따라 들어오는 콩밥 한 줌과 소금물과 구린내나는 무 몇 쪽을 주는데 처음에는 저것을 먹고 어떻게 사나 이전에 우리 집 개도 저러한 대접은 안 받았을 텐데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대접하냐 하고 이제는 꼭 죽었다 하였더니 모진 것이 목숨이요 배고프니 안 먹을 수 없어서 차차 행습이 되니까 평소에 우리 집에서 고량진미 먹을 때보다 더 맛이 나서 꿀보다도 맛난 것은 그 콩밥입디다. 이것을 먹고 날마다 목숨을 보전하여 나가는 중 날마다 하는 일은 피아노 테이블 위에 놓는 레이스 만드는 것인데 별별한 공상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고 끊어질 듯이 고픈 배를 쥐고 홀로 울 때는 금할 수 없이 세상의 무정함은 76 「경성지방 예심종결서」(1919.8.30) ;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19.11.6) ; 『매일신보』 1919.11.8, 「전무후무한 대판결, 240명을 한 번에 언도해, 피고의 대부분은 모조리 학생」 ; 이현희, 「한국여성의 항일투쟁과 일제의 탄압고-3·1운동시의 여성항쟁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31, 한국사학회, 1980, 78~80쪽. 77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19.11.16)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20.2.27) ; 『매일신보』 1919.11.8, 「前無後無한 大判決, 240명을 한 번에 언도해, 피고의 대부분은 모조리 학생」 ; 이현희, 「한국여성의 항일투쟁과 일제의 탄압고-3·1운동시의 여성항쟁을 중심으로-」, 『사학연구』 31, 한국사학회, 1980, 78~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