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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해제 불교·학생의 대연합이 결성되었다. 69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독립선언과 만세시위가 준비되어 갔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에서 준비하기로 하여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었다. 초고를 받은 최린은 이를 천도교측과 개 신교측에서 동의를 얻었다. 독립선언서는 인류의 양심에 비추어 볼 때, 한민족의 독립이 당 연하다는 점과 강력한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하는 것으로, 1910년대 독립운동의 이론 과 논리가 정리되었다. 70 완성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에서 사장 이종일 의 책임 아래 2월 27일경 21,000여 장이 완성되었다. 71 독립선언서가 인쇄되고 독립선언을 위한 준비가 마무리되자 각 종단은 민족대표를 선임하였고, 선임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 서에 서명·날인하였다. 대표로 선임된 33인은 천도교측 손병희 외 14명, 개신교측 이승훈 외 15명, 불교측 한용운 외 1명이었다. 72 2월 28일 저녁 손병희 집에서 열린 마지막 모임에서 대표들은 계획을 변경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을 선언하기로 했던 것을 바꾸어 바로 이웃한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이들이 시민들 앞에서 체포될 경우에 폭력사태가 일어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73 이들의 행위는 뒷날 엇갈리는 평가를 빚어냈다. 더구나 이들 가운데 불 교지도자를 비롯한 소수를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가 뒷날 친일분자로 변절했기 때문에 두고 두고 이들의 대표성이 부정되어 오기도 한다. 한편 파고다공원에서는 대표들을 기다리다가 학생들이 독립선언식을 주도해 나갔다.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뒤늦게 독립선언장소가 변경된 사실을 알고 독자적인 선언 식을 거행하고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 중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 례를 올리기도 하였고, 프랑스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본국에 통고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영사관 앞에서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74 서울의 만 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공약삼장에 밝힌 그대로 질서정 6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판결서(손병희 등 48인)」, 「독립운동사자료집」5, 46-47쪽. 70 이병헌 편저, 「1919년 5월 8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의 한용운 취조서」, 「3·1운동 비사」, 161-617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판결서(손병희 등 48인)」, 「독립운동사자료집」5, 20쪽. 71 이병헌 편저, 「권동진 선생 취조서」, 「3·1운동 비사」, 삼일동지회, 1966, 180쪽 72 최린, 「자서전」, 175쪽. 73 이병헌 편저, 「1919년 3월 8일 경무총감부에서 검사의 이갑성 취조서」, 「3·1운동 비사」, 294-295쪽. 7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예심종결결정서(김형기 등 학생단)」, 「독립운동사자료집」5, 72-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