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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3·1운동 편) 이 충격을 받아 독립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천도교 인사들은 다시 김윤식·한규설 등 대한제 국시기 고위직을 지낸 인사들에게 사람을 보내 동참을 요구했지만,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한편 학생들은 1919년 1월 하순부터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강기덕·김원 벽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64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고 독립선언서의 기초 등 세부적인 계획을 수립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은 2월초 대통합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천도교측은 개신교측 이승훈에게 연합을 제의하 였다. 그 결과 조국독립이라는 명제 아래 교단과 종파의 차이를 극복하고 연합할 것에 동의 하였다. 65 이들은 거사 날짜를 3월 1일로 잡았다. 1월 22일 승하한 광무황제의 장례일이 3월 3일로 잡혀 있었는데, 여기에 참례할 많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서울로 모여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 다. 그 분위기를 이용하여 대규모의 시위를 벌이고자 했는데, 국장일 앞날이 3월 2일 일요일 이었다. 그래서 이 날을 피하자는 개신교측의 요구에 따라 하루를 앞당겨 3월 1일로 거사날 짜를 잡았다. 66 그들은 이 외에도 구체적인 활동방침을 확정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비롯한 각 종 문서의 기초와 인쇄 담당, 일본 정부와 의회 및 강화회의에 참가한 여러 나라 대표들에게 보낼 통고문과 청원서의 송부 방법, 독립선언서의 서울과 지방 배포의 역할분담, 민족대표 의 상징, 불교계의 동참 등이 그 내용이었다. 67 이들은 독립운동에 동참할 뜻을 밝힌 한용운의 노력으로 불교계와의 연합도 성사시켰다. 68 또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학생들과도 연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학생대표들 은 회의를 열고 두 가지 활동전략을 수립하였다. 하나는 연합시위에 참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편에 따라 학생의 독자적인 시위를 전개하는 것이었다. 이로써 천도교·개신교· 6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3·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6(3·1운동사자료집), 867쪽; 李炳憲 編者, 「손병희 조선 독립을 선언함」, 「3·1운동 비사」, 삼일동지회, 1966, 64쪽. 65 이병헌 편저, 「1919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 예심에서의 최린 취조서」, 「3·1운동 비사」, 589쪽; 「1919년 3월 7일 경무총감부에 서의 최남선 취조서」, 「3·1운동 비사」, 659쪽. 66 이병헌 편저, 「1919년 3월 12일 경무총감부에서 검사의 함태영 취조서」, 「3·1운동 비사」, 64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조선 3·1독립소요사건」, 「독립운동사자료집」6(3·1운동사자료집), 874쪽. 67 신용하, 「3·1독립운동 발발의 경위」, 「일제강점기하의 사회와 사상」, 신원문화사, 1991, 60-66쪽. 6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예심종결결정서(손병희 등 48인)」, 「독립운동사자료집」5, 1983, 19쪽; 김법린, 「3·1운동과 불교」, 「3·1 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동아일보사, 1969, 75-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