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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해제 여자고등보통학교 노영렬(盧永烈) 51 을 알몸으로 십자가 위에 반듯이 눕힌 다음, 이글거리는 화로를 십자가 옆에 놓고 쇠꼬챙이를 시뻘겋게 달구어 유두를 서너 차례 난자한 후에 결박을 풀어주었다. 그런 후에 칼로 사지를 오이 자르듯이 나누어 선혈이 비처럼 쏟아졌다. 또 다시 다른 십자가로 옮겨서 머리채와 함께 다섯 군데를 묶어 공중에 매단 채 누이고는 고약을 불에 녹여 머리털과 음문, 좌우 겨드랑이에 붙이고 이를 식힌 후에 힘껏 잡아떼었다. 털과 살갗이 함께 벗겨져 선혈이 땅에 그득하였다. 왜놈들은 이를 보고 크게 웃으며 즐거워하였다. 소위 우두머리라는 자가 ‘너는 그래도 감히 만세를 부르겠는가?’라고 물었다. 노영렬이 대답하기를 ‘독립을 이루지 못한다면 죽더라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원래의 감옥에 다시 가두고 며칠 동안 음식을 주지 않았다. 3일만에 다시 악형을 가하였는데 왜병 2명이 좌우에서, 한 사람은 여학생의 손을 꽉 잡고, 한 사람은 죽침으로 머리를 무수히 찔렀다.” 52 1920년에 간행된 신문기자 멕켄지의 책에는 다음과 같이 만세운동에 참여한 여성들이 당한 고통이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찰서에서는 시위에 조금이라도 가담했으면, 여학생과 젊은 부녀자들의 옷을 벗기고 때리고 완전히 알몸으로 만들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본 남자들 앞에 노출시키는 것이 예사였다. 한국 여자들은 백인 여자들처럼 자기의 몸을 남에게 보이기를 싫어하는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알고, 이런 방법으로 욕보이기를 좋아했다. (중략) 서대문 밖에 있는 감옥은 전형적인 일본식 감옥이었다. 여기에는 여자간수도 있었다.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고, 그들의 검사를 받는다는 것은 여학생으로서 죽기보다 싫은 것 같았다. 아마 그들은 감옥의 의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들에게 되도록 많은 수치를 주려고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략)” 53 “또 하나의 희생자는 기독교신자인 선생의 아내로 매우 총명하고 지성적인 부인이었는데 생후 넉 달된 어린애가 있고 거기에다 두세 달 된 태아까지 있었다. 그는 시위에 참가한 후에 51 해방 후 간행된 『중앙신문』 1946년 2월 2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당시 고등여학교 교원이던 노영렬(盧永烈) 여 사는 왜놈의 헌병들이 잡아다가 묶어놓고 화저로 지지고 카롤 가슴을 찌르며 다리 사이와 겨드랑이 밑에 어름찜질을 하고 비틀 면서 ‘이래도 만세를 부를테냐’ 하니까 노 여사는 ‘독립이 되지 않으면 죽어도 셀 수 없이 부르겠다’ 하고 대답하여 할 수 없이 내놓았다고 한다.”  52 박은식 지음, 김도형 옮김, 앞의 책, 2008, 248~249쪽. 53 F, A, 멕켄지 저, 이광린 역, 앞의 책, 1969, 209~2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