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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 해제 이를 통해 서대문형무소 여성 수감자의 출신 지역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수형기록카드 가 남아 있는 180명 가운데 가장 많은 지역은 경기도 34명(18.89%)이며, 그 다음은 함경도 32명(17.78%), 서울 26명(14.44%)의 순이다. 서대문형무소가 서울에 위치하여 서울, 경기 출신자들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것은 지리상 연관성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함경남북도의 인원이 전체 대비 두 번째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특이한 현 상이다. 서대문형무소와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충청남북도(13명, 7.22%)나 경상남북도(17명, 9.44%)의 2개 권역 출신의 합(30명, 16.67%)보다 수감 비율이 높은 수치이다. 이러한 현상은 수형기록카드가 남아있는 인물 전체에 대한 분석에서도 동일한 양상이 확 인된다. 출생지 확인이 가능한 4,481명 중 함경도 출신 인물들이 1,391명, 31.1%를 차지하여 가장 많은 비율을 보인다. 서울경기권역 1,140명(25.4%)보다 251명(5.7%) 많은 숫자이다. 34 한편, 1930년 함경남북도의 인구는 전국 인구 20,256,563명 대비 2,157,814명, 10.65%였 다. 35 수감자 중 함경도 출신 비율이 전국 인구 대비 비율보다 20.45%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함경도 지역민의 일제에 대한 저항이 타 지역보다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원인은 함경도 지역의 당시 인구 이동 현황, 함경도 지역에 1920년대부터 시작된 일본 독점자본의 광산 개발과 비료공장 등의 설치에 따른 활발한 노동운동, 이에 따른 수감 자들의 증가와 항소에 의한 서대문형무소로의 이감 등과도 연관이 있다. 특히 여성 수감자들의 다수중 학생과 노동자의 비율이 많기 때문에 함경도의 지역적 정서 도 검토되어야 한다. 함경도의 개방적인 지리적 특성과 활달한 대륙적 기개, 강인한 생활력 과 실천력, 높은 교육열 등 지역성이 배경이 될 수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송 계월(1910년생)이다. 그녀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출신으로 부친 송치옥이 북청노동연맹 집행위원으로 신창만세운동에 조력한 인물이었다. 또 신창공립보통학교 재학 시절 스승 김 용식은 신교육 보급 운동에 앞장서 신창공회당을 건축하였고, 1919년 3월 12일 신창만세운 동을 주도하였으며, 이후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활동을 펼치다가 피체되어 고문으로 순국한 인물이었다. 36 34 박경목, 『일제 강점기 서대문형무소 연구』, 충남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5, 89~90쪽. 35 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통계연보(1930년)』, 1932, 22쪽. 36 국가보훈처 공훈록 참조.